김선재 소설 <10화>
남자는 그런 게 뭔지 모른다. 그저 감각이 사라진 코와 귀를 더듬어 그것들이 거기 있다는 걸 확인하고 온 길과 갈 길을 가늠하며 걸을 뿐이다. 이미 소실점이 사라진 길 위에서 남자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눈앞에서 눈의 무게를 못 이긴 가로수 가지가 부러지고 어디선가 달려온 오토바이가 미끄러진다. 그 각각 다른 찰나들이 하나의 결론에 이른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몰랐다. 순서 없이 일어나는 많은 일들―죽음과 사고와 사랑 같은―의 마지막은 언제나 같았다. 아무도 거기 남은 사람은 없었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떤 세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고 다시 다른 세계가 지나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 이 순간 또한 그 언젠가 보았던 세계―지상 위의 모든 삶이 일시에 정지한 것처럼 조용해지던―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젖은 신발 속에서 발은 시리다 못해 뜨겁고 눈보라가 귓가를 지나간다. 무수히 많은 눈을 구경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남자가 맞닥뜨린 눈은 처음이다. 해마다 눈이 내렸지만 맹세코 이런 적은 없었다. 온몸이 타는 듯 아프다.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눈삽을 든 채 끝없이 쏟아지는 눈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으로 서 있던 차들은, 우아한 불안들은, 화물 트럭에 부딪쳐 부러진 전신주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때였다. 어디선가 굉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 이유가 뭔지 깨닫기도 전에 남자는 머리통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넘어진다. 몸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바닥에 내던진 거울처럼 어딘가가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다. 뭐지? 남자는 눈을 감고 생각한다. 여기가 어딘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느끼는 지금의 감각들이 무엇 때문인지. 물론 그건 아주 짧은 순간이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뜬다. 위협적인 눈송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든다. 정체 모를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잘못한 사람은 없는데 왜 모든 것들이 잘못된 걸까.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남자는 가까스로 상체를 일으킨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 있는 행인들. 사람들. 혼자가 아니다. 피예요, 피가 나요. 남자와 눈이 마주친 무리 중에서 소년이 소리친다. 남자는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장갑에 흥건한 검은 얼룩에서 김이 솟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사이에도 장갑 위에는 눈이 내리고 내려앉은 눈 위에 다시 눈이 내린다. 남자는 손을 떨며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코피를 삼키듯 계속 숨을 삼킨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세상이 돌기 시작한다. 발신음을 들으며 남자는 눈 위에 도로 드러눕는다. 바늘 같은 눈이 얼굴에 꽂힌다. 언젠가는 눈 녹듯 사라질 실감의 눈들.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다. 눈을 감자 새가 우는 소리가 들린다. 눈들이 운다. 머리 위의 새는 어디로 갔지? 남자는 중얼거린다.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진다. 아내는 내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남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다만 아무도 거기 없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우리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남자는 사력을 다해 그렇게 생각한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