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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4 09:58 수정 : 2014.03.11 09:56

조영석 소설 <추구> ⓒ이현경



조영석 소설 <1화>



삽라(歃羅)의 산세는 순하고 부드러웠다. 갓난이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처럼 산줄기는 마을을 넉넉히 품으며 뻗어 내렸다. 낮고 부드러운 등성이가 끊어질 듯 솟아오르며 북쪽과 서쪽으로 기었다. 기슭에서부터 굵은 마디를 뻗으며 나온 바위들은 해안까지 이어져 암초가 되었고, 자연스레 마을의 방파(防波)를 해주었다. 눈길이 가닿는 곳까지 대체로 바다는 사철 잔잔하였다. 어부들은 목선(木船)에 그물을 널어 생선을 잡아먹었고, 더러는 내다 팔았다. 제상(堤上)은 백제로 흘러가는 산의 등줄기를 쳐다보았다. 오후 내내 식은 해가 노랗게 굳어 먼 골짜기 사이로 추락하고 있었다. 평상 위에서 제상은 하루에 한 번 세상에 핏물이 번지는 것 같은 한기(寒氣)에 등줄기로 식은땀을 흘렸다. 국경은 사방 어디를 가릴 것 없이 소란스러웠다. 수레에 실려 서라벌로 들어가는 부상병들의 팔다리에서 구더기가 끓었다. 바닷물이 해안 모래를 넘나들 듯이 피부색과 생김새가 다른 적들이 국경을 오고 갔다. 먼바다로 쓸려가는 모래알처럼 병사들은 무참하게 살다가 잠들 듯 죽었다. 평상 위로 모첨(茅簷) 그늘이 조금씩 번졌다. 삽라에서 서라벌은 멀고도 가까웠다. 걸음이 빠른 말로 한두 식경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임금의 말은 좀처럼 닿지 못했다. 제상은 자신의 거처가 마음에 들었다. 봄은 남서쪽 산들의 맥을 타고 올라와 마을 어귀까지 들어와 있었다. 낮에는 뒤란에 야생 개나리가 한껏 피어 있는 것을 보았다. 소리 소문 없이 죽고 또 나는 것들을 제상은 믿을 수 없었다.

-나으리, 저녁을…….

명화(明花)가 가지런히 쪽 찐 머리를 조아리며 소반을 들고 있었다. 어느새 육지 처자가 다 된 모양이었다. 몇 달 새 입성이 달라진 명화를 보면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여염의 말은 부질없어 보였다. 명화는 하고 싶은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별로 없는 처자였다. 제상은 명화가 그네 나라의 말을 참새처럼 재잘거리는 모습을 떠올려보곤 하였다.

-나으리.

명화는 나으리라는 말을 좋아했다. 제상의 집을 다녀가는 갖바치나 서라벌 벼슬아치들이 제상더러 이르는 말을 명화는 제상의 이름으로 알아들었다. 나으리가 명화의 나라에서 명화를 겁탈하고 그네의 어미를 죽인 무사와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명화는 알지 못했다. 나으리라고 부르면 제상이 돌아다보았고, 명화는 제상의 얼굴을 보는 것이 좋았다. 제상의 얼굴은 깊고 온화하여 한창때의 봄과 같았다. 거칠고 강한 턱 선이 고향 사내들과는 달랐다. 생선으로만 끼니를 이어가던 고향 사내들은 하관이 날카로웠다. 명화는 날카롭고 좁은 그들의 턱과 자신의 턱이 서로를 찌를 것만 같아 고향에서는 사내들을 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 노자의 《도덕경》 5장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즉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지푸라기 개처럼 여긴다’에서 따옴.




조영석(소설가)



조영석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4년 〈문학동네〉 신인상에 〈초식〉 외 6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고, 2011년 단편소설 〈삼엽충〉으로 〈실천문학〉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선명한 유령》, 《토이 크레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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