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4.02.25 10:05 수정 : 2014.03.11 09:57

조영석 소설 <2화>



-여기 놓거라.

명화는 조심스럽게 소반을 제상 앞에 놓았다. 소반 위 그릇들이 달그락거렸다. 산나물 무침과 보리밥, 농주가 담긴 사발이 올라 있었다. 소금에 절인 흰 살 생선도 한 토막 보였다. 제상은 명화를 쳐다보았다. 머리를 매만지면서 명화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저고리 위로 드러난 목선이 고왔다. 제상은 손을 뻗어 그 선을 매만지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명화는 어둠이 짙어진 마당을 가로질러 정지로 들어갔다. 제상은 새처럼 좁은 보폭으로 걷는 명화의 종아리가 가여웠다. 몇 달 전 나흘이나 이어지던 폭풍이 그친 새벽 바닷가에는 새들이 잔뜩 죽어 있었다. 먼바다에서 파도는 아직 사나웠다. 제상은 뭍을 향해 목을 늘어뜨리고 죽은 새들의 사체를 거두었다. 숨이 아직 붙어 있는 새들은 칼로 멱을 따 피를 뺐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요량으로 새들을 수습하던 중, 제상은 암초 더미 아래 물미역과 엉켜 쓰러져 있는 명화를 보았다. 옷가지는 형편없이 찢어져 있었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이어지는 선과 머리카락, 젖가슴의 모양만으로는 어느 지방 출신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치마와 저고리 모양이 이 땅의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코밑에 고여 있는 바닷물이 잔잔히 흔들렸다. 여자는 살아 있었다. 제상은 여자의 고개를 가누어 물통에 담아온 우물물을 입속으로 흘려주었다. 기갈이 든 듯 여자는 눈을 뜨지 못한 채로도 제상이 주는 물을 달게 받아먹었다. 제상은 멱을 감던 아이들을 마을로 보내 아낙들을 불렀다. 아낙들은 이불 홑청을 가져와 여자를 덮었고, 수레에 실어 마을로 옮겼다.

-쓰시마(對馬) 여자구먼요. 이름은 명화라고…….

작살을 다듬던 제상에게 만덕의 처가 말했다. 제상은 쓰시마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만덕의 처 말고도 마을에 왜(倭)말이 가능한 자가 여럿 있어서 명화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명화가 무쳐 내온 나물은 대개 심심했다. 처음 명화가 캐온 이름 모를 나물들을 보았을 때 제상은 젓가락을 들지 못했다. 명화의 눈은 깊었으나 표면에 물살이 일고 있었다. 명화는 더듬더듬 바다 건너를 가리켰다. 고향에서 먹던 것들이라고 했다. 제상은 마을 사람들은 캐지 않던 나물들을 처음으로 집어 먹었다. 쌉싸름하고도 달큼했다. 오래 씹어야 단맛이 우러나는 나물의 결들은 질기고 끈끈했다.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마당으로 까마귀 두 마리가 내려앉아 울었다. 제상은 보리밥 한 움큼을 뿌려주었다. 나라 안이 뒤숭숭한 지 벌써 여러 달이 지났다. 관아와 서라벌을 파발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임금의 울음소리가 마을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임금의 울음은 뱃사람들의 울음과 달랐다. 소리가 없어 듣는 귀는 편안했지만, 깊고 질겨서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며칠 전 군(郡)의 새 태수가 제상의 집을 찾아왔다. 꿩을 잡았으니 농주라도 한잔 하자는 것이었다. 태수는 서라벌 사람이었지만 골품이 낮았고 삽라에는 연고가 없었다. 서라벌에서 직을 받았지만, 어쩌면 죽을 때까지 서라벌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나마 접경으로 파견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태수는 여겼다. 코밑에서 시작하여 턱을 거쳐 울대뼈까지 늘어진 수염이 반듯했다. 입술과 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신중해 보이는 사내는 조찰히 늙어가고 있었다. 제상은 태수의 남은 생을 가만히 넘겨다보았다. 부귀는 없을 것이나 천수는 누릴 상이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조영석 <추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