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소설 <3화>
-박 공, 상의 울음이 그치질 않소이다.
태수는 군데군데 새치가 돋아 꺼칠해진 수염을 쓸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딱한 일이요.
제상은 짐짓 창 너머 어둠으로 캄캄해진 뒷산을 바라다보았다. 등잔에 고인 생선 기름에서 그을음이 자주 일었다. 두 초로의 사내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술은 거의 다 떨어져가고, 바람이 차가워져서 침묵에 잠긴 목이 더 칼칼했다.
-태수께서 서라벌로부터 전갈을 받으신 게요?
-공께서 마을로 돌아온 걸 아직은 모르는 듯하오만, 공을 찾아 서라벌로 보내달라는 전갈은 며칠 전부터 득달같소이다.
-일 년만이구려.
-정사를 안 보신지도 몇 달이 지났다는군요. 보해 왕자께서도 민망하신지 서라벌에 통 계시질 않는다 하더이다. 감포(甘浦)에 나가 제를 올리다가, 토함산에 올라가서는 며칠이고 굶으며 치성을 드린다는군요.
-그래, 태수께서는 뭐라고 답을 보내셨소?
제상은 남은 술을 태수의 사발에 따라주며 미소를 지었다. 굵은 주름이 눈가에 가득 잡히는 것을 보며 태수는 제상의 나이가 적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녹을 먹는 자로서 거짓을 고할 수야 있겠소. 이달 안으로 공을 서라벌로 보내겠다고 파발을 띄워두었소마는, 공께서 국경을 넘으시겠다면 굳이 그것까지는 손을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공의 천거가 아니었다면 내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겠소? 그래 간다면 어디로 가시려오?
제상은 태수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받은 대로 돌려주려 애쓰는 서라벌의 사내가 거기 앉아 있었다. 제상은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돌려주려는 상대의 심중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태수는 제상이 알던 서라벌 사람들과 핏줄이 달랐다. 임금은 제상에게 보리 한 움큼도 준 것이 없었다. 제상을 살린 것도, 키워준 것도 임금은 아니었다. 하급 군졸이었던 제상의 양아비는 대마 정벌을 떠났다가 바다 위에서 죽었다. 임금은 누구에게도 주는 것 없이 받아먹고만 있었다. 기침을 하면 상궁들이 수라를 들였고, 울음을 울면 무희들이 춤을 추어 달랬다. 제상은 가축과 다름없는 삶을 사는 임금이 딱했고, 그 임금에게 멱 줄을 잡힌 자신이 쓸쓸했다.
상을 물리고 명화를 불렀다. 명화가 평상 맞은편에 쪼글치고 앉았다. 제상은 흘러내린 명화의 귀밑머리를 올려주고 싶은 생각이 들어 손을 뻗었으나 그만두었다. 한 해 전, 제상은 고구려에 다녀와야만 했다. 벌써 수년 전부터 볼모로 잡혀 있던 임금의 아우, 보해 왕자를 빼내오라는 명이 있었다. 늙은 대신들은 당파를 떠나 그들 자신과 가신들을 빼고, 제상을 천거했다. 북방을 다녀온 자가 드물었기도 했지만, 목숨을 내어놓아야만 하는 일이었다. 고구려의 왕은 사납기가 범 같다고 하였다.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밀어 넣기에 사고무친인 제상만 한 인물은 없었다. 벼슬아치들은 제상에게 제상의 목숨을 맡겨놓은 것처럼 말했다. 임금의 혈통이 겪은 고통은 그들의 것이었지만 제상의 고통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신하 된 자로서 임금의 고통을 모른 척한다면 죽어 마땅하다고 아뢰오.
대신들은 한목소리로 울며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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