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소설 <4화>
제상은 보해와 함께 평양성을 빠져나오던 밤을 떠올려보았다. 대동강의 물길은 깊고도 넓었다. 사람의 힘만으로 건너기 힘들었다. 사공은 배를 묶어놓고 고개를 저었다.
-내리 며칠씩이나 비가 온 터라 물길이 사납소. 배를 띄우기가 어렵소이다.
멀리 동이 희미하게 터오고 있었다.
-이보게 박 공, 이대로라면 잡히지 않겠는가.
-물길을 따라 상류로 가보십시다. 물길은 올라갈수록 좁아지게 마련이외다.
제상은 겁에 질린 보해를 끌다시피 하여 상류로 길을 잡았다. 지축이 조금씩 울리는 것이 말발굽 소리라고 제상은 생각했다. 이 길로 강을 넘지 못하면, 왕자와 자신의 목숨은 없을 것이었다. 고구려의 왕은 제상에게 후했다. 술과 음식을 넘치도록 주었고, 궁의 별채를 내주어 부족함 없이 지내게 해주었다.
-먼 길을 오셨소. 왕자의 근심을 잘 달래주고 머물 때까지 머물다 가시오.
제상은 고구려 왕의 말과 행동에서 지극함을 느꼈다. 그는 제상에게 술과 음식을 주었다. 빚진 자가 등을 돌렸을 때, 빚을 준 자의 분노를 제상은 가늠하기가 두려웠다. 열흘이나 달포 간격으로 세작들은 서라벌로부터 밀지를 날랐다. 임금의 독촉은 기갈이 들린 듯했다. 제상은 서라벌로부터 들어오는 돈을 무조건 평양에 풀었다. 보해와 함께 쌀을 사들여 기근이 든 백성들을 구휼했다. 서라벌이 백제와 왜로부터 약탈해온 쌀이 몇 봉우리의 산과 강을 건너 평양까지 흘러들어 다시 이름 모를 사람들의 배를 채우는 이치가 제상은 신기했다. 씨를 뿌리는 사람과 거두는 사람, 빼앗는 사람과 베푸는 사람이 이어지지 않는 세상이 제상은 어지러웠다. 보해는 반듯한 장정이었지만 왕가의 피가 흐르는지 제상은 알 수 없었다. 시전 상인들과 어울리면 잡배로 보였고, 골짜기에서 약초를 캐러 다닐 때는 심마니와 다름없었다. 제상은 보해와 함께 평양에 살아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몸서리를 쳤다. 서라벌에서 날아오는 임금의 울음이 밤마다 목을 졸랐다. 고구려의 왕에게는 편지를 남겨두었다. 면전에서 말로 전한다고 해서 자신의 행위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상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해는 구하고자 했다. 빚진 자로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제상은 생각했다. 강의 상류는 다행히 폭이 좁았다. 물살은 여전히 거셌지만, 수심은 얕았다. 무릎을 약간 넘는 강물은 등줄기가 서늘하도록 찼다. 무명 바지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다리를 붙들어 감았다. 보해 왕자가 저만치 가다 넘어지다 다시 일어서서 첨벙거리는 것이 보였다. 등 뒤에서 군사 수백의 함성이 들렸다. 구름이 옅어지는가 싶더니 그믐달이 드러났다. 희미하지만 사람 둘 정도는 과녁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신라의 땅이 가까워져 오자 핏줄이 더욱 당기는지 보해는 맞은편 물가를 향해 끈질기게 달리며 기었다. 제상도 걸음을 서둘렀다. 이끼 낀 바닥의 돌들이 미끄러웠다. 보해가 순간 보이지 않았다. 제상은 아찔했다. 죽는다면 그것은 보해가 아니라 자신이어야 했다. 보해는 큰 바위를 붙잡고 다시 물위로 올라와 쓰러져 있었다.
-박 공, 발을 헛디뎠나 보오. 난 틀렸소.
제상은 보해를 일으켜 안았다. 살이 허공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제상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제상은 온몸을 질질 끌면서 보해를 부축해 걸었다. 둘은 걸어서 땅을 밟고 서라벌로 가거나, 편안하게 물속에서 누워 죽는 길밖에는 없었다. 휘파람 소리가 끊일 듯 이어지고 있었다. 참방거리며 과녁에서 벗어난 살들이 강에 박혔다. 제상은 걸었다. 다음번 휘파람이 불고 제상은 등허리에 충격을 느꼈다. 물가에 보해를 던졌다. 풀섶에서 말 두 마리의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왕자님.
서라벌의 복식이었고, 말투였다. 사내들은 보해를 말에 실었다.
-박 공, 박 공의 말이오. 날랜 말이니 금방 따를 수 있을 것이오. 다급하니 우리는 먼저 출발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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