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석 소설 <8화>
제상은 일렁이는 해안가에 서 있는 명화를 보았다. 바닷바람에 새까만 머릿결이 나풀거리고 있었다. 명화가 손을 흔들었다. 잘 가라는 말인지, 잘 다녀오라는 말인지 제상은 알 수 없었다. 경마잡이가 명화를 말에 태우고 기슭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제상은 먼바다로 고개를 돌렸다. 노꾼이 노를 고정해놓고 보리밥을 손으로 뭉쳐 먹었다.
미사흔은 보해와도 임금과도 닮아 있었지만,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핏줄이 어느 골짜기에서 엉켜 새로운 핏줄을 만드는 것인지 제상은 알 수 없었다. 사쓰마(薩摩)는 산세가 잔잔했다. 역관의 말에 따르면 범과 이리가 없다고 했다. 산짐승들이 순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계림보다 살기가 못하지 않다고 말했다. 계림 말을 하는 역관은 어린 시절 감포에서 왜구에게 피랍된 사내였다. 듣던 것과는 다르게 왜왕은 신장이 육 척에 달했고 어깨가 넓었으며, 웃음소리 또한 호탕했다. 무사들에게 끌려 궁에 들어갔을 때, 제상은 내관들이 왕에게 귓속말을 전하는 것을 보았다. 닷새가 조금 안 된 뱃길이었는데, 저들에게는 더 빠른 뱃길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임금이 제상의 말을 잘 따랐다면, 제상은 별다른 의심 없이 왜에 정착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무사들의 창검이 시퍼렇게 빛나고 있었다. 제상은 생침을 삼켰다. 목숨을 거는 것과 두려움을 없애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그래, 그대는 무슨 일로 계림을 등지고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거기는 우리를 미물로 여기질 않는가?
역관이 부지런히 계림의 말로 왜의 말을 옮겼다.
-서라벌 놈들이 제 아비와 형제들을 싹 다 죽였사옵니다.
-어째서?
-평생을 서라벌을 위해 피땀을 흘렸사온데, 백제와 내통했다며 죽였사옵니다.
-그래, 네가 사무치는 일이 많겠구나. 잘 왔다. 내가 네 원한을 풀어줄 수는 없지만 남은 생을 편하게 지내도록은 해주마.
-하늘 같은 은혜를 뼈에 새겨 잊지 않겠사옵니다.
제상은 왜왕에게 계림의 도기 굽는 법을 전했고, 천문을 읽는 책을 바쳤다. 왕은 흡족해했다. 제상은 왜왕이 자신의 의도를 모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그의 극진함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는 제상에게 받은 것 없이 호의를 베풀었다. 바다 건너 서라벌의 왕은 제상에게 징징거리며 울기만 하였다. 제상은 자신이 계림의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다고, 미사흔을 돌려보내지 않을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할 줄 아는 말은 계림의 것이었다.
-여기, 미사흔이라고 계림의 왕자가 인질로 와 있으니 공은 같은 집에 기거하며 향수를 달래도록 하라.
왜왕은 제상에게 미사흔과 같이 지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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