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4.05 19:19
수정 : 2007.04.05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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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코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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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군사정부 시절, 대통령은 폭력의 언어로 손쉽게 세상과 사람을 장악하고 편을 갈랐다. 독재체제는 언어를 통하여 지배를 합리화하고 복종을 확보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언어에서 공포와 억압을 느꼈다. 부정과 두려움의 언어는 통치기반을 강화하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다. ‘빨갱이’는 단죄의 근거, ‘전라도 사람’은 배제의 근거, ‘대통령 각하’는 검열의 근거였다. ‘대통령 각하’는 하도 지엄해서,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조차 멋모르고 ‘대통령의 책임’ 운운하다가 동료들의 거센 항의와 때로는 폭행을 당했고, 심지어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릎 꿇고 훈육을 받아야 했다.
민주화는 독재자에게 빼앗겼던 언어를 다시 찾아오는 계기였다. 1987년 이후 외형상 ‘대통령 각하’는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가 복원되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기본적으로 언어를 가져야 누릴 수 있는 자유였다. 민주화는 언어를 소유한 자, 언어를 생산하는 사람들의 자유는 회복시켜 주었지만, 자기들의 언어를 갖지 못했던 서민대중이나 소외계층에까지 언어의 힘을 나눠준 것은 아니었다. 몇몇 언어는 국가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었으나, ‘보통’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부지불식간에 정치권, 언론, 학계에 포진한 보수 식자층이 언어의 새로운 주인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이는 언어를 가지면 권력 지향적이 되고, 그래서 언어를 가진 자 대부분이 기득권층이 되기 쉽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안타깝지만 당연한 귀결이었다. 대다수 시민들은 다시 지배 엘리트들이 주조한 언어에 순종해야 하고 검열당하며, 나아가 그 언어를 충실하게 재생하고 전파하는, 과거와 똑같은 언어의 공간에 갇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거의 언어관습이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달라진 시대, 성찰과 소통의 정교한 언어가 있어야 할 곳에, 아직도 두려움과 편견으로 박제된 일방통행의 언어들이 가득하다. 그 언어들은 예전보다 훨씬 대담하게 세상을 단정하고, 그 단정들은 끊임없이 공포를 환기하며, 많은 사람들의 사고와 판단을 억압한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복잡하게 변화한 남북 관계는 “지난 10년 동안 이 나라가 온통 빨갱이 세상이 되었다”는 한마디 말로 간단하게 무력화되어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대로 각인된다. 개인의 정체성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 운동권 출신이야”라는 말 한마디면, 그는 경계해야 할 ‘타자’가 되고, 그와의 소통은 차단된다.
출범 당시의 경제, 사회정책 노선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신자유주의로 선회한, 그래서 진보 진영은 물론 많은 서민들에게 커다란 좌절을 안겨준 참여정부의 정체성에 대해 ‘그들의’ 언어는 극히 최근까지도 굳이 ‘좌파, 포퓰리스트 정부’라며 비난했다. 그러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의 과감한 결단이 있어 가능했다”고 추켜세우는 민첩한 변신술은 이 시대의 희극이자 비극이다. 상당수 사람들은 ‘반미 정부, 미래에 관심 없는 나눠먹기 정부’라고 귀가 따갑게 들어왔던 이 정부가, 어떻게 ‘미국’과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러면 선진국이 되지 말자는 얘기냐”라는 윽박지름은, 자기들의 지향만을 ‘선진국’으로 단정하겠다는 오만한 검열이다. 아무도 선진국이 되려는 것을 싫어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다만 꿈꾸는 ‘선진국’의 내용이 다를 뿐이다. 어설픈 지배 언어들이 위력을 떨치는 세상, 우리 민주주의가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이윤재/코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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