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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5.20 18:03 수정 : 2007.05.20 18:03

홍은택 NHN 이사

세상읽기

지난해 광화문으로 자전거로 출퇴근할 때 궁금한 현장이 있었다. 출근길은 수서에서 출발해 동호대교, 옥수, 금호터널을 지나 장충단길로 꺾어져 흥인문로를 따라가다가 청계천로, 광화문으로 흘러간다. 흥인문로에서 청계천로로 좌회전하기 전에 오간수교를 건너는데 이 다리 못미처 요즘 보기 드문 현상이 매일 관찰됐다.

횡단보도도 없는데 사람들이 떼거리로 횡단한다. 걷는 품새도 당당하다. 경찰관도 못 본 척한다. 이 지점의 흥인지로 양편에는 평화시장과 신평화시장이 마주보고 있다. 두 시장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가. 그러면 횡단보도를 그어주면 될 텐데. 신호체계를 보면 횡단보도가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오간수교를 건너면 횡단보도가 있다. 다리 양쪽에 횡단보도가 있다고 해서 교통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세종로에 횡단보도를 긋는 데 몇 년이 걸렸다고 했다. 세종로의 횡단보도는 보행자 중심으로 도로 체계를 바꾸겠다는 선언문과 같다. 하지만 이 전 시장도 오간수교 남단에 횡단보도를 긋지 못했다. 가상의 횡단보도 밑으로 지하보도가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하보도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의 반발이 거세다. 다수의 보행권과 소수의 생계가 부딪치는 상황. 정치의 고전적인 딜레마다.

그러나 한번 보행권을 인식한 보행자들은 지하보도 대신 하나둘 무단 횡단하기 시작해 지금은 대세가 됐다. 속사정을 아는 경찰은 단속하지 않는다. 그러자 교통법규가 문란해져 좀더 보편적인 법익이 침해받는다. 무단 횡단과 지하보도의 불편한 동거는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 명백한 것은 다수의 보행권이 존중되지 않는 한 궁극적 해결은 아니라는 점이다.

정보의 도로에서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어제의 정보 수신자가 이제는 정보의 이용자다. 평화시장에서 코앞의 신평화시장으로 가려면 지하보도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했듯이 과거 이용자들은 정보 소비의 주체가 아니었다. 정보 생산자들이 정한 방법대로 정보를 수용해야 했다.

지금은 이용자들이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정보를 소비하는 주체가 됐다. 인터넷은 이런 정보 이용권을 가능케 했다. 나아가 다대다의 전파력을 가진 인터넷을 통해 정보 소비자들은 서로 발신하기도 하고 가끔 집합적으로 의제를 설정하는 힘도 발휘하고 있다. 정보 이용자들은 신문사로 비유하면 독자에서 기자, 나아가 편집자의 자리까지 꿰차는 양상이다. 이 과정에서 지하보도 상인에 해당하는 정보의 생산자들은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그렇다면 이용자들에게 의제 설정에서부터 정보 생산까지 모든 것을 맡기는 게 궁극적 해결인가. 전통적 정보 생산자들은 지하보도 상인과 같은 운명인가. 그것은 역사에서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을 의미한다. 하지만 회의적이다. 이용자들의 집합적 의제 설정은 종종 즉자적이며 생산된 정보는 일관된 신뢰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지식 생산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져 왔다. 정약용 이전의 학자들에게 책은 암송의 대상이었다. 그렇게 수가 적은 만큼 생산 주기가 길었다. 지금은 하루에 수백권씩 나온다. 정보지식의 홍수다. 네이버에 등록되는 텍스트와 동영상은 일일 수백만개다. 나는 지식의 생산 주기가 짧아진 게 꼭 바람직하다고 생각지 않는다. 지식의 전파 주기는 짧아질수록 좋지만 오랜 시간 공들여 생산하는 지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 점에서 전통적인 정보 생산자들과 구두와 옷을 파는 지하보도의 상인들은 다르다. 그러나 전통적인 정보 생산자들이 공들여 정보지식을 생산하고 있는가. 아니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보의 생산과 전달이 분리되고 있는 시대에 ‘전달’ 쪽에서 밥먹고 있는 사람으로서 고민하는 화두다.


홍은택 NHN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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