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7.22 17:49
수정 : 2007.07.22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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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택 NHN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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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나라당 대통령 예비후보 청문회를 보면서 후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동영상으로 기록해 뒀더라면 불필요한 논란을 없앨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보들이나 후보 주변 인물들은 의혹이 제기된 시기의 동영상 파일을 검증위원회에 제출하고 청문회에서는 같이 동영상을 보면서 시비를 가리면 된다.
‘황의 법칙’이 앞으로도 유효하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2002년 삼성전자 황창규 반도체 총괄사장은 국제반도체학회(ISSCC)에서 반도체의 메모리 용량은 1년에 두 배씩 증가한다는 이론을 발표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6기가비트의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발표하면서 7년 연속 두 배씩 메모리의 집적도를 높여왔다. 16기가비트 반도체로 32기가바이트 메모리카드를 만들면 책 3만권이나 디브이디급 영화 20편을 저장할 수 있는데 그 카드의 크기가 손톱만하다.
데이터 저장용량은 데이터 생산을 촉진한다. 국제시장조사기관 아이디시(IDC)가 4월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2006년 한 해 동안 국내에서 생성되고 복제된 모든 디지털 정보의 양은 2701페타바이트(PB) 규모. 페타바이트는 2의 50제곱이다. 책 2조7천억권의 분량으로 서울시 전역에 쌓아놓으면 1. 높이에 달한다고 한다. 급기야 2008년에는 데이터 생산량이 국내 전체 데이터 저장용량을 초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그런데 생산 또는 복제되는 데이터의 거의 대부분이 영상과 음성 데이터다. 이 말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동영상과 사진을 찍고 복제하고 있다는 얘기다. 2010년에는 국민 한 사람이 평균 2시간 분량의 디브이디급 영화 165편에 맞먹는 데이터를 생산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럼 2020년에는?
데이터의 저장용량과 데이터의 생산량이 서로 치고받으면서 끝을 알 수 없는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다. 양적 증가는 질적인 전화를 가져온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영화 〈파이널 컷〉은 그런 세계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조이칩을 내장하고 있다. 조이칩에는 눈으로 본 모든 것이 저장된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시신경의 떨림도 신호이기 때문에 이 신호를 잡아내 저장하면 된다. 앨런(윌리엄스)은 사람이 죽으면 조이칩을 꺼내 망자의 인생을 편집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최종손질(Final Cut)이다. 이 시대가 오면 대통령 후보들에게는 조이칩을 제출하라고 하면 된다. 그런 시대가 올까?
사람들은 게을러서 디지털 카메라의 조작도 귀찮아 눈으로 본 것은 그냥 모두 기록되게 하고 나중에 원하는 것만 꺼내 보고 싶어 할 것이다. 또는 자신이 보기 원하는 것만 기록되게 하거나. 그래서 어차피 조이칩의 시대가 와서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쌓여도 결국 주관적 기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눈에 자신이 촬영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런 시대는 유쾌하지 않을 듯하다. 우리는 경험이라는 재료를 기억으로 요리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장면만 식탁에 내놓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아프고 슬프고 부끄러운 경험을 잊고 새로운 날들을 살 수 있다. 그러면 망각의 자유는 없어지는 것일까.
영화에서 앨런은 망자의 인생을 미화하는 쪽으로 편집한다. 안 좋은 기록들은 다 지운다. 편집의 자유는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앨런이 남의 눈에 찍힌 자신과 관련된 기록에서 진실을 추구하면서 영화는 급반전한다. 거의 모든 것들이 기록되는 시대라고 해도 진실까지 기록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실을 껴안을 수 있는 용기는 여전히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홍은택 NHN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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