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8.09 17:32
수정 : 2007.08.09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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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코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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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사건일수록 충격과 안타까움은 오래 간다. 대다수 국민들은 스물세명의 한국인이 조금만 더 조심했으면 이번 피랍사태가 없었을 것이라는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그래서 ‘남은 인질들의 무사생환’이라는 당장의 시급한 목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여전히 납치된 당사자들의 경솔과 부주의가 이번 사태의 근본 원인이라는 사태발생 당시의 생각에 계속 시달린다.
이번 사태에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 스물세명이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와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은 현지의 어지러운 정세를 놓고 그들끼리 서로 가해자니 피해자니 하는 상반된 공방을 펴고 있지만, 납치된 일행 스물세명이 현지에서 어느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설령 현지 탈레반 사령관의 주장처럼 “아프간 사람들의 가난과 비참함을 선교 목적에 이용하려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민간인들을 3주 이상 소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억류하고, 상식적인 국제정치와 외교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공간, 인권보호의 철저한 사각지대에 방치해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국내에는 아직도 완강한 태도로 그들에게 유감과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많다. 사태를 불러들인 당사자라는 혐의에 집착하여 그들이 전적인 피해자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다. 인질들의 생명을 단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한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는 탈레반이 있고, 정당하게 입국한 외국인의 신변안전에 아무런 책임의식 없이 미국 눈치만 보는 아프간 정부가 있고, 사태 해결의 실질적인 해법을 쥐고 있음에도 자국민이 납치되었을 때와는 달리 ‘테러리스트와는 절대 타협불가’ 운운하며 나 몰라라 외면하는 미국 정부가 엄연히 있건만, 세상의 가혹한 화살은 유독 그들 스물세명과 그들을 보낸 교회를 계속 겨냥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이는 뿌리 깊은 국가우월주의 사상이 이번 사태에도 여지없이 적용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주화가 되었어도 국가가 국민보다 우월하다고 떠받드는 사람들은 납치된 스물세명이 국가의 위신을 떨어뜨리고, 대통령 선거처럼 중대사가 많은 나라에 쓸데없는 수고를 일으켰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 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국가는 그 구성원인 국민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그 반대로 국민이 국가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이번 사태처럼 위험에 빠진 자국민을 보호하고 구출하려는 노력은, 국가가 하지 말아야 할 성가신 일이 아니라 국가가 존재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 중의 하나다.
또 다른 이유는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사회 전반의 심리적 욕구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 스물세명은 기성 사회의 조직이나 인적 구성과 비교하면 취약하기 짝이 없다. 크지 않은 교회가 중심이 된 단기적 목적의 결성체일 뿐만 아니라 절반 이상이 30대 여성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사회적 약자의 모습이다. 우리 사회는 아무리 피해자라도 약자이기 때문에 쉽게 타자화되고, 가해자 대신 오히려 더 큰 책임을 뒤집어쓰는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다. 만약 이번에 납치된 사람들이 지위와 권력이 두드러진 중년 남성 집단이었다면 지금처럼 끈질기게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진 않을 것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들은 나라가 구출해 줄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고난을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면 놀랍고 슬프고 무섭다. 피해자인 그들과 그들 가족에게 더는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윤재/코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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