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11 17:57
수정 : 2007.09.11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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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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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정치학도로서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최근의 여야 당내 경선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너무도 자주 곤혹스러운 상황에 부닥치게 된다. 우리가 배운 민주주의 원칙과 이론은 물론 일반 상식마저 수시로 무너뜨리는, 기발한 방법과 절차, 아이디어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의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의 당내 경선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는 ‘사실상’ 무효라고 할 수 있다. 위헌 논란을 포함한 헌법적, 법률적 쟁송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론적으로는 ‘원천적’ 무효에 가깝다.
무엇보다 여야 공히 1인 1표라는, 표의 등가성을 통한 평등선거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최소 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다. 동일 선거에서 당내 표와 여론조사 대상 표의 완전한 등가성 파괴(사실상의 역차별)처럼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없다. 물론 선거인단 구성의 지역별 당원 및 인구 구성, 인구 비례와의 현저한 불일치 역시 민주주의 원리에 대한 부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한 사람의 표가 다른 몇 사람의 표와 같은 비중을 가져서는 결코 안 된다. 사람에 대한 그와 같은 차등과 차별에 맞서 싸우며 근대 민주주의는 발전해 왔으나 우리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특정 조직과 단체가 자기들 고유의 결정 절차와 방법을 가질 수는 있으나 표(인간)의 등가성을 파괴하고 차별하는 원칙을 제도화할 때 민주적 결정 과정으로 인정되기는 어렵다.
둘째, 여론조사를 통한 결정 과정이 갖는 직접·비밀선거 원칙의 파괴도 문제다. 질문자에게 대답하기 위해 미리 자신의 지지후보를 밝히는 순간 비밀선거의 원칙은 파괴된다. 당내 결정의 한 제도적 과정과 규칙으로서의 여론조사는 단순 여론조사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내면의 개인적 의사를 불특정 타인에게 미리 공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때 민주주의는 존재하기 어렵다. 그것은 비밀선거가 아니라 공개선거라고 할 수 있다. 곧 민주선거로서의 구성 요건을 결여하는 것이다. 또한 질문자, 조사자라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사를 대신 표현·전달해주기 때문에 민주적 의사결정의 근간인 직접성도 정면으로 부정되고 파괴된다. 비밀성과 직접성이 파괴되기 때문에 대의(代議)민주주의를 넘어 대대의(代代議) 민주주의로서 소위 ‘이중 간접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여론조사는 원칙적으로 민주적 선거나 투표로서의 결정 요건을 구성하지 못한다.
셋째, 경기 도중에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대통합민주신당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정해진 규칙에 대한 승복에서 출발한다. 그 규칙이 누구에게 유리하고 불리할지 참여자 누구도 모르는 데서 바로 민주주의는 출발한다. 결과가 사전에 결정되고 예측된 제도는 민주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대통합민주신당은, 참여자가 이미 결정된 가운데 진행 중인 게임의 규칙을 도중에 바꾸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모험을 서슴지 않았다.
지난 두 번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대파동을 겪고 난 뒤 민주주의 이론가들은 “개표(집계방법)가 투표(인민의사)보다 더 중요해선 결코 안 된다”며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의 본질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민주주의의 고전적 언명처럼 투표와 개표의 절차는 간단할수록 더 민주적이다. 즉 복잡할수록 비민주적이고 작위적인 것이다. 보통·직접·평등·비밀 선거라는 현대 민주선거의 거의 모든 원리를 파괴하고 있는 현재의 여야 경선을 보며 우리는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 엉뚱한 방향에서 근본적 위기에 직면했음을 깨닫게 된다.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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