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9.30 18:13
수정 : 2007.09.30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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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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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해마다 가을이면 미국의 소도시 아이오와에서는 국제창작프로그램이 열린다. 나는 한달 전부터 아이오와에 머물며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온 30여명의 작가들과 함께 지내는 석달이 내게는 소중한 충전의 시간이자 다른 나라의 문학과 문화를 좀 더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기대한다.
작가들에게는 매주 창작프로그램 일정과 문화 스케줄이 함께 전달되는데, 우선 이 작은 도시에서 평일에도 서너 개 이상의 공연이나 낭독회가 열린다는 사실에 놀랐다. 물론 모든 문화행사가 화려한 무대나 장비를 갖추고 많은 관객을 끌어모으는 것은 아니다. 입장료도 비싸지 않고 무료 공연이나 낭독회도 많다. 매주 낭독회가 열리는 한 서점은 2층의 빈 공간에 간이의자를 놓으면 그대로 공연장이 된다. 이 서점에서 녹화된 저자와의 만남은 지역 텔레비전에서 수시로 방영되고 웹진 등에서도 다시 만날 수 있다. 책들에 둘러싸여 작품에 귀를 기울이는 50여명의 관객들 표정이 어찌나 진지한지, 문화를 누린다는 것은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문화의 역할이란 비타민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타민은 탄수화물이나 단백질처럼 직접 열량을 내는 영양소는 아니지만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고 피로를 풀어주며 질병과 노화를 예방해 주는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문화는 생계보다는 부차적인 듯하지만 인간의 정신이 노화되거나 경직되는 걸 막아주고 창조적 윤활제가 되어준다. 그리고 한꺼번에 섭취하기보다는 매일 필요한 양을 꾸준히 섭취해야 하는 것도 문화와 비타민의 공통점이다. 그들에게 문화는 흥행의 대상이나 신기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우리의 문화풍토는 어떠한가. 심심치 않게 관객동원 100만을 돌파하는 영화가 나오고 유명 스타의 공연이라면 티켓을 구할 수 없을 만큼 한국의 문화산업은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란한 축제가 삶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바람처럼 지나가버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가 일상적 깊이와 지속성을 잃어버린 채 일회적인 오락이나 소비의 대상으로 변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산업이라는 말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사용할 때부터 우리는 이미 문화를 돈의 논리로만 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수십만원짜리 로열석에 앉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연을 봐야만 고급 문화인이 되는 건 아니다.
소비문화와 함께 문화의 시대를 열었던 또하나의 주역은 영상문화라고 할 수 있다. 덕분에 한국 영화는 십여년 사이에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급속히 성장했지만, 한편으로 다른 문화예술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현상은 예술의 균형 있는 발전을 막을 뿐 아니라, 수용자의 감각적 편향이나 획일화를 가져온다는 점에서도 문제다. 나는 크고 작은 낭독회를 곳곳에서 지속적으로 여는 것이 지나친 시각 편향의 문화를 극복할 수 있는 한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소리로 전달되는 질감과 속도는 빠르게 지나가는 영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텍스트와 만나는 즐거움을 선사해 줄 것이다.
낭독회를 통해 맛본 낯선 언어의 질감과 아름다움,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강가나 풀밭에서 식사하면서 듣는 음악회, 밤 10시의 카페에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젊은이들, 거리의 시멘트 바닥에 박혀 있는 동판화들과 거기에 새겨진 글귀들, 벤치에 앉아 그걸 들여다보며 생각에 잠긴 사람들 …, 내가 아이오와에서 발견한 문화의 얼굴은 이렇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런 문화적 품과 저력이 세계의 예술가들을 불러모아 국제적인 창작프로그램을 사십년째 꾸려올 수 있는 힘이리라.
나희덕/시인·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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