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12.04 18:33
수정 : 2007.12.0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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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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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12월19일의 선택을 앞두고 이 아침에 세 가지를 조용히 생각해 본다.
첫째로 소명으로서의 정치다. 예부터 교육과 함께 정치는 늘 소명으로 불렸다. 사익 아닌 공익과 헌신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교육과 정치는 결코 뗄 수 없다. 정치는 국민과 후대가 보고 배운다는 점에서 곧 교육과 같다. 루소가 플라톤의 <국가>를 ‘지금까지 집필된 것 중 가장 훌륭한 교육론’으로 명명한 이유는, 정치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교육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정치 자체가 시민에 대한 교육 효과를 가지는 동시에 교육의 결과가 다시 정치의 수준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여 ‘정치는 현재의 교육’이고, ‘교육은 미래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둘 모두 보여주는 만큼, 솔선수범한 만큼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금의 후보, 미래의 대통령 누구에게서 우리는 자녀들에게 이러 이러한 점을 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도덕성 없는 리더십은 불가능하다. ‘과거는 지나간 미래’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과거’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정녕 무겁다.
둘째, 삼성사태로 대표되는 사익의 국가점령을 극복하는 문제다. 한국의 시민과 세계시장은 지금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의 초거대 부패문제를 민주주의 역량을 통해 어떻게 넘어설지 주시하고 있다. 삼성은 사적 시장영역을 넘어 국가와 사회의 모든 공적 영역, 곧 정부·검찰·언론·교육, 심지어 시민단체와 문화예술마저 돈으로 매수하고 사사화하려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시장과 부패가 공동체를 지배하는 금권정치·시장독재·시장전체주의의 도래다.(<한겨레> 2007년 6월20일치 30면 칼럼 참조) 오이디푸스가 전염병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임을 모른 채, 전염병으로부터 자신들을 구해 달라며 스핑크스로부터 테바이를 구한 영웅 오이디푸스에게 탄원했던 <오이디푸스 왕>의 테바이 시민들처럼, 가난으로부터 우리를 구한 영웅시대가 낳은 부패구조에 다시 미래를 맡길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지도자를 국민의 이익에 관심을 두는 지도자와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둔 지도자로 나누고 후자를 인간을 가장한 괴물·늑대로 규정한 뒤 “최선의 형태를 가진 정치사회는 권력이 중간계급의 손에 있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오늘의 일류국가들이 사익·부패와의 전쟁을 통해 선진사회의 초석을 놓을 때 가장 현명한 전사들은,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해 시장과 사익의 불평등·부패, 국가장악 시도를 막아낸 민주시민들이었다. 1인1표 평등의 위력인 것이다.
셋째, 민주개혁 진영을 향한 고언이다. 민주파는 하나의 연합세력으로 심판받고 집권을 추구해야 한다. 87년 이후 선거경쟁은 항상 3당 합당, 디제이피 연합, 노무현-정몽준 연합처럼, 단독집권이 불가능하였다. 게다가 민주파들은 지속적으로 분열하였다. 삼성사태는 사회·경제적 선진화를 위해서는 단일한 최대 민주연합을 형성하여 보수파와 국가비전 경쟁을 해야 한다는 엄중성을 보여준다. 중도개혁·개혁진보·중도좌파의 포괄연대를 형성하여 심판을 받으라는 것이다. 유럽의 사례들은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 경제적 사회·민주화의 단계에서는 자유-노동 연합, 또는 시민-민중 연합, 중도-진보 연합을 통해 연립-연합 정부를 구성해 선거에서 승리해 많은 사회경제적 선진화 과제를 해결해 왔음을 보여준다. 정동영· 문국현, 민주당·민주노동당은 각각 대통령·국무총리, 경제·반부패, 통일외교안보, 노동, 여성, 과학기술·정보통신 분야의 대표주자를 선정해, 연합 예비정부를 꾸려 심판을 받으라는 것이다. 특별히 민주노동당의 경우 민주화 이후 정책반영과 집권참여의 실패가 제도와 전략, 두 측면에 있었음을 깊이 숙고하고, 연합정부의 부분체제(예컨대 예비내각에서의 심상정의 노동부 장관 입각)를 차지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반영할 수 있을 것이다.
박명림/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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