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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4.15 22:29 수정 : 2008.04.15 22:29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 진정한 승자는 불안이다. 보수는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향수나 현재의 안락으로 유권자를 유혹하지 않는다. 품 안의 것이 욕망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보수는 ‘더 높이 날아라, 아니면 추락한다’는 구호로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그러나 기꺼이 몰락할 수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다. 한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온몸으로 싸웠던 사람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까닭이다.

민주화 이후 선거에서 서로 다른 욕망들이 격렬하게 부딪히고 다투었지만 사회는 언제나 균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꿈을 찾곤 했다. 이는 무엇보다 서울 시민이 남북과 동서로 갈라진 한반도를 묶어주는 균형추 역할을 했고, 20대가 허가받지 못한 미래의 이상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제 집 팔면 다른 곳에 두세 배 큰집 살 수 있는 서울시민이 자기 집값이 더 오르길 바라고, 학교와 학원에 갇혀 있는 대가로 풍족하게 살아온 20대가 정치에 관심을 끊으면서 균형도 깨지고 꿈도 사라졌다.

과잉소비사회에서 불만은 작아지고 불안은 커진다. 전통적 산업사회에서도 빈곤이나 직업상실, 혹은 공동체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불안이 일시적이고 국부적이었다면 지금은 항구적이고 전면적이다. 특히 산업사회에서 불안이 소유와 관련된다면 지식기반경제에서는 접속이 문제다. 자동차를 소유하지 못해서 갖는 불안이 과거의 것이라며, 지금의 불안은 자동차의 상표가 갖는 상징체계에 접속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소유의 주체가 사람이라면, 접속에서 주체는 자본의 상징체계다. 따라서 소유의 정도에 따라 나의 불만이 증감하는 반면, 접속은 내가 아닌 체계의 논리에 따라 단절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 서울시민과 20대가 이미 완전한 접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소유와 접속이 뒤섞인 시대에 머물러 있다. 이미 충분히 부를 축적한 서울시민과 컴퓨터와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20대는 자본과 성공의 상징체계에서 분리되지 않기 위해 더 큰 성공에 몰입할 것이다.

이들은 현재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공동체를 외면한다. ‘따로 또 함께 가는 길’이 이들에겐 보이지 않는다.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중심에 접속하고 있으려면 쉽게 넘나들 수 없는 장벽으로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자기들끼리 키 재기를 해야 한다. 이렇게 스스로를 감금시키는 사람들은 접속을 통제하는 권력 앞에서 한없이 굽실거린다. 본래 불안과 복종은 이음동의어다. 이제 권력은 감옥을 넓히는 대신 불안을 키울 것이다.

욕구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은 행복한 만큼 언제나 불행하다. 좌절된 욕망은 실망을 불러오고, 금지된 욕망은 불쾌감을 주며, 억압된 욕망은 고통의 뿌리가 된다. 불행을 막겠다고 욕구를 차단하면 그만큼 남아 있는 욕구에 집착하게 된다. 따라서 욕구를 없애는 것보다 다원화하는 것이 덜 불행한 삶을 위한 지혜일 것이다.

‘불만 없는 불안’을 떨쳐내려면 중심에 접속하려고 집착하기보다 욕구를 다원화해야 한다. 욕구의 다원화는 금욕과 쾌락 사이에서 ‘불안 없는 불만’을 가지고 이쪽저쪽을 넘나들며 관계를 넓히는 것이다. 관계맺음은 반드시 매개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욕구와 가치를 매개로 관계를 확장하면 불만이 커져도 불안은 작아진다. 더구나 이때의 불만은 부정적 현실을 부정하는 전복의 동력, 곧 잘못된 권력을 불안하게 만드는 힘이다. 불안 세력과 맞서려면 진보가 서울에서 그리고 20대와 새로운 관계맺음에 나서야 한다.

박구용/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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