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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06 19:58 수정 : 2008.05.06 19:58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세상읽기

5월은 화려한 만큼 비극적이다. 1980년 광주, 시민군은 잔인성과 폭력성이 줄어든 좀더 인간적인 사회를 위해 죽음이 예정된 도청을 향했다. 그들의 바람대로 개선된 것도 있지만 한국은 약자에겐 여전히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감사를 뜻하는 카네이션조차 어떤 이들에겐 상처를 덧내는 독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에서 가족은 소유권의 주체로서 생산과 소비가 완결되는 경제공동체였으며, 씨족과 혈족의 집합체로서 적과 동지를 구별하는 정치공동체이기도 했다. 가족은 삶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지배하는 사회통합의 제도였으며, 신분과 권력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이념이었다.

사회·경제적 분업체계가 점차 강화되면서 가족의 단위는 급속도로 작아졌고, 그 형태도 다양해졌다. 자발적으로 독신을 택한 사람도 많아졌다. 그만큼 서로를 묶어주는 연대성의 범위가 좁아진 것이다. 하지만 가족 내부의 유대는 더 친밀하고 조밀해졌다. 특히 한국에서 가족 관계는 계층(급) 상승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각자의 삶을 희생할 만큼 내밀하고 끈끈하다.

기업에서처럼 가족 안에서도 성과급제가 은밀하게 관철된다. 계층 상승의 기여도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고 권력이 집중된다. 부모들은 희생 담론과 효도 제의를 통해 아이들을 계속 통제하려 들지만, 상위권 성적으로 가족 부흥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지배자 행세를 한다. 더구나 무능력이 입증된 부모는 얼굴을 가린 흉악범 취급을 받기 일쑤다. 사랑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해온 부모에 대한 자식의 복수는 이처럼 잔인하다.

사람들 사이의 성애가 더 이상 종족 보존을 위한 짝짓기가 아닌데도 가족은 오히려 시장에서 잘 팔릴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무한 경쟁 사회에서 끈 떨어진 연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사랑은 냉혹한 현실과 대리전쟁을 벌이는 부모의 희생이 아니다. 자식 사랑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나보다 잘살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진정한 사랑은 나보다 좋은 조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은 조건에서도 인간답게 사는 길을 보여주는 것, 곧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이다.

가족주의와 맞서고자 가족의 가치를 폄하할 필요는 없다. 가족을 결혼이라는 계약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 문명의 씨앗으로 보든, 인간의 자연적 속성에 깃든 신적 영혼으로 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오랜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사회화와 인격 형성 과정에 가족이 결정적인 몫을 수행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역할에 비추어 대부분의 복지사회는 가족을 보호할 의무를 국가에 부과하는데, 한국은 거꾸로 가족이 국가를 보호하라고 명령한다. 경제적 소외와 문화적 다원화로 분열된 사회를 통합하라는 명령이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가족에게는 어김없이 비정상 혹은 결손 가족이라는 꼬리표가 달린다.

한국에서 정상 가족은 남녀 부부와 한 명 이상의 자녀가 있어야 하고, 갖가지 위험과 재난을 스스로 극복할 만한 능력이 있어야 한다. 한부모, 무자녀, 소년소녀가장, 이주민, 동성 가족은 물론이고 빈민이나 실업 가족, 심지어 효도방학이 달갑지 않은 서민 가족의 아이들에게도 비정상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씌운다. 외로움과 어려움 때문에 생긴 상처를 덧내는 것은 이들의 삶이 결손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폭력이다. 이런 가족들이 계층 상승의 전쟁터가 된 정상 가족보다 더 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사회, 그래서 폭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사회를 꿈꾸며 5월의 시민군은 끝까지 도청에 남았을 것이다.


박구용 전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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