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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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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독일 뮌헨 근교 다하우의 유대인 수용 시설을 보러 가던 길이었다. 열 명 남짓한 청소년들이 담소를 나누며 경쾌한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 갔다. 열일곱, 열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남녀 학생들은 인솔 교사를 따르고 있었다. 내가 수용소 입구로 들어섰을 때 그들은 추모탑 앞에 반원 형태로 서서 묵념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추모탑을 둘러본 뒤 안내소 건물로 들어가 기본적인 정보를 얻고 나왔을 때 그들은 추모비 주변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둥글게 둘러앉아 있었다. 서로 손을 잡고 고개를 깊숙이 숙인 자세였는데 놀랍게도 다들 울고 있었다. 환한 대낮에 많은 관광객 앞에서,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오열을 숨기거나 과장됨 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 뒤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현충일에는 묵념하고 광복절마다 순국선열을 기리는 의식에 참석했지만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울어본 적은 없었다. 빼앗겼던 조국이나 전쟁에서 잃은 삼촌을 위해 울음으로써 슬퍼해야 한다고 배운 적도 없었다. 나중에야 유대 문화에 특별한 애도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애도란 슬픔의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그것을 충실히 표현하고, 잃은 대상을 잘 떠나보낸 뒤, 그것을 내면화시키며 성장하는 총체적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유대 문화의 애도 매뉴얼을 보면 혈육의 죽음을 맞았을 때 애도자는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장례까지 3일 동안 종교적·사회적 의무가 면제된다. 장례 뒤 7일 동안은 집에 머물면서 방문객의 조문을 받고, 떠난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장례 후 한 달 동안도 여전히 슬픔을 표현하는 기간으로 정해 머리를 자르지 않고 사회활동을 최소화하고 매일 교회당에 가서 기도한다. 1년이 지나면 떠난 자를 기리는 특별한 의식을 행하고 그 뒤 매년 반복한다고 되어 있다. 한 인간의 정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특별한 대상과 맺는 애착 경험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그 특별한 대상(사람뿐 아니라 조국·자유·이상·직위 등)을 잃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애도하느냐에 따라서도 한 사람의 건강과 성장이 좌우된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공동체의 집단 무의식 속에 깃든 박탈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의 건강과 성숙도가 결정된다. 현대로 접어들면서 거의 모든 공동체가 전통적인 애도 문화를 폐지하거나 외면했다. 부모를 잃어도 장례식장에서 간단하게 예식을 치른 뒤 슬퍼할 시간도 없이 차를 달려 일터로 돌아간다. 이성과 합리를 중시하는 사회는 슬픔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미성숙한 태도라 여긴다. 거부당한 개인적·사회적 슬픔들은 공동체 내부에 남아 현대 사회를 특징짓는 병리적 징후로 드러나고 있다. 슬퍼하지 못하는 사회는 폭력적으로 변한다. 내가 철들면서부터 들어온 친일파 문제를 아직도 듣는 이유는 잃은 조국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이 제대로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본이 생각날 때마다 한 번씩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행위는 패전의 상실과 좌절감이 제대로 애도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사를 청산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말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애도하기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박탈의 감정을 충분히 경험하고 표현하고 떠나보낸 다음 성숙한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중국 정부가 쓰촨성 지진 희생자들을 위해 3일간 애도 기간을 정했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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