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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5.29 20:43 수정 : 2008.05.29 20:43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세상읽기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동네 형들이 귀향하면 깡통을 하나씩 돌리곤 했다. 베트남에서 배급받은 미군 시레이션(야전식량)이었다. 복불복이었다. 똑같이 카키색인데다 영어도 모르니 내용물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큰 깡통이라고 좋은 게 아니고(커피), 작은 것이라고 나쁜 게 아니었다(초콜릿). 그중에 최고는 고기가 든 햄 깡통이었는데, 우리 집에 배당된 것은 크래커였다.

인상적인 것은 깡통이었다. 고작 크래커 몇 조각을 담으려고 비싼 양철로 감싼 것이 놀라웠다. 개에게 유산을 남긴 미국인 이야기라든지, 낡은 자동차를 길가에 버리는 사람이 많아 골치라는 미국 소식을 듣고서도 ‘그럴 수 있겠구나’ 여긴 것은 깡통에서 느낀 미국의 힘 때문이었다. 40년 전 이야기다.

1060∼70년대는 미군부대의 시방서가 우리 건설회사의 표준이었다. 그 시절 건설회사에 다녔던 그가 대통령이 되고서, 쇠고기 문제를 그렇게 쉽게 처리해버린 것도 미국이 세상의 표준이던 젊은 날의 무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리라. 미군 깡통에 홀렸던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을 선망하는 대통령의 심정을 대충은 안다.

그런데 ‘국민과의 소통이 부족했던 점’에 고개 숙인 지난주 대통령의 사과는 문제의 핵심에서 크게 벗어났다. 잘못된 진단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꼬이게 만드는 법이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건 전달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허나 최근 정치적 혼란은 대통령의 인식(세계관) 자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잘 다스리려고 애쓰는데도 안 되면, 돌이켜 자기 인식을 점검하라”(治人不治, 反其智)는 맹자의 조언은 이 대목에서 되새겨볼 만하다.

촛불을 든 이들의 주장은 첫째, 미국인들이 먹는 고기라고 해서 우리도 그냥 먹지는 않겠다는 저항이다. 검역주권이라는 말 속에 이런 뜻이 잘 들어 있다. 적어도 이 땅에서는 우리 방식으로 먹을거리를 선택하겠다는 뜻이다. 이건 깡통 햄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나라를 키워온 기성세대가 보람으로 느낄 만한 인식의 발전이다.

둘째, 국민의 먹을거리를 두고 한-미 자유무역협정 같은 다른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기업가적 태도’에 대한 분노다. 쇠고기 문제를 다루는 대통령의 태도에서 미국은 부드럽게 대하면서, 도리어 국민은 쇠고기의 ‘소비자’로 취급하는 기업가의 눈길을 느낀 것이다. 이 속에는 정치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이 함께 들어 있다.

‘이해하다’로 번역되는 ‘언더스탠드’가 낮은 곳(under)에 서는 것(stand)이라는 해설을 본 적이 있다. 실은 이건 정치가의 덕목이다. 기업가가 젊고 건강하며 꽤 많은 이들을 부려 목표를 달성하는 자라면, 정치가는 모자라고 쇠약하며 부족한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트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형마트에서는 자주 깡통 햄을 세일한다. 그 이름이 스팸이다. 스팸은 특정상품의 브랜드지만, 인터넷의 쓰레기 정보를 ‘스팸 메일’이라 하듯 저질 음식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깡통 햄을 선망했던 대통령과 기성세대는 그것이 쓰레기 음식이 되어버린 오늘날 현실을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 햄의 눈길로 스팸을 바라보면, 혀만 찰 뿐 그 속내를 이해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촛불 속에서 고작 배부른 투정이나 얼뜨기 젊은이들의 치기, 혹은 좌파의 선동을 연상하는 피상적인 눈길로써는 그 속뜻을 알아낼 길이 없다.


오늘날 문제를 푸는 첫걸음은 자기 세계가 햄에 머물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부터로 보인다. 그리고 스팸의 세계로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 다음이 소통이다. 언더스탠드?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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