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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6.01 20:16 수정 : 2008.06.01 20:16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세상읽기

2001년 부시 정권 출범 뒤 한때 에이비시(ABC)라는 말이 유행했다. 영어로 ‘클린턴 아니면 뭐든지’(Anything But Clinton)의 약자다. 곧 ‘클린턴 정부가 했던 것만 아니면 다 된다’ 혹은 ‘클린턴 정부가 한 것은 모두 바꾼다’는 의미다. 부시 정부는 이를 증명이나 하듯 북한 핵문제에서 클린턴 시절의 대북 합의와 정책 방식을 모두 부정했다. 그러나 6년의 시행착오 속에서 많은 것을 잃은 뒤, 2007년 2·13 합의를 통해 클린턴 방식으로 복귀했다.

요즈음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노무현 아니면 뭐든지’(ABR·Anything But Rohmoohyun)란 말이 떠돈다. 이명박 정부의 참여정부 정책 부정을 이르는 말이다. ‘국방개혁 재검토’, ‘대북 포용정책 폐기’, ‘한-미 관계의 복원 운운’ 등 도처에서 참여정부처럼 하지 않겠으며, 그때의 정책은 모두 바꾼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심지어 문제만 발생하면 과거 탓으로 돌리거나, 과거처럼 하지 않겠다는 말이 버릇처럼 뒤따른다. “과거와 달리 위협적인 발언 때문에 북한을 도와주고 협상하는 것은 앞으로 없다”, “과거와 달리 요란법석 떨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사실을 한참 잘못 알고 있다. 참여정부는 북한의 위협을 줄이고자 주도적으로 북한을 지원했지, 단 한 차례도 북한의 위협에 굴복해 지원한 적이 없다. 북한의 대남 압박에 대해서도 침착한 대응을 강조하다 보수층으로부터 욕을 먹은 적은 있어도 요란을 떤 적은 없다. 북한이 지원요청을 하기를 학수고대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그들의 사소한 압박에도 대통령 주재 회의까지 열며 법석을 떤 것이 정작 누구인가?

이 정부는 시작부터 많은 것을 잃고 있다. 비현실적인 ‘비핵 개방 3000’을 내세워 전문가들에게조차 외면당하고, 불필요한 말의 남발로 상대방과 대면조차 못한 채, 남북 관계를 악화일로로 만들었다. 미국과는 쇠고기 협상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이 대통령은 캠프데이비드에서 부시 대통령의 카트를 운전했지만 정작 노무현 대통령도 내놓았던 한-미 공동성명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일본에는 과거사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듯한 발언을 되풀이하면서 일본 우익의 책동에 ‘대처 난감’이라는 자충 상태를 자초했다.

참여정부에서 남북 관계의 발전은 6자 회담에서 한국의 위상을 높여 왔다. 한국 정부는 북한을 설득하고 미국을 이해시켜 9·19 공동성명을 도출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고, 한-미 공조를 통해 2·13 합의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앞으로 열릴 차기 6자 회담에서는 남북 관계 경색으로 말미암아 협상의 고수인 김숙 6자 회담 수석대표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얻기 어려울지 모른다. 6자 회담의 중심에서 한국이 배제될 경우, 한국 외교의 국제적 위상은 그만큼 추락하게 된다.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노무현 방식을 부정한다면, 이명박 방식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에게 이명박 정부의 통일외교안보 정책에 대해 물으면 “잘 몰라요, 없는 것 같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명박 정부는 에이비아르(ABR)에 앞서 국민에게 자신의 비전과 구체적인 전략적 경로를 제시해야 한다. 바로 이런 설계도가 없으니, 정책 수행에 동원해야 할 자원과 방법, 기간 등을 담은 제대로 된 시방서가 눈에 뜨일 리 없다. 이는 단순히 정권 차원을 넘어 국가적 불행일 수 있다. 그동안 준비를 못했으면 지금이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에이비아르’를 하더라도 무분별한 공세가 아니라 자신의 설계도·시방서와 견주어서 하라. 그것이 자신을 선택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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