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06.03 19:32 수정 : 2008.06.03 19:32

김선우 시인

세상읽기

한달째 계속된 촛불의 물결을 이끈 중·고등학생 벗들. 생명을 벼랑으로 밀고 가는 너무도 위험하고 무능한 ‘협상’에 대해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우리 아이들이 광장으로 모였을 때, 그것은 말랑말랑한 감각의 열린 축제였다. 그들은 광장에 모여 자유롭게 토론하고 발언하고 놀고 격려하며 소통했다. 노래하고 춤추고 박수 치며 비폭력 평화시위의 질서를 내부로부터 길어 올렸다. “이것은 굳어버리지 않은 가장 여린 생명의 감각이다.” 나는 이렇게 메모장에 썼다. 한 방향을 향해 걸으면서도 툭툭 장난치며 서로 다른 걸음걸이로 걷고 있는 아이들에게서 자율과 민주의 새로운 희망을 보았다. 광장의 십대들에 이십대가 동참하고 마침내 어른들까지 모여 함께 놀았다. 놀면서 뜻을 전했다.

지도부 없는 자발적 참여 역사를 가져본 아이들, 즉석 토론으로 행진 길을 스스로 정해 본 아이들. 내게 이것은 ‘엑스 세대’보다 놀라운 싱그러운 ‘촛불 세대’의 출현이었다. 역사의 진화 방식에 대해 회의적인 내게 어렴풋하지만 희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아이들이 만들어갈 미래가 궁금했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시작됐다. 살수차의 물대포가 시위대를 향해 난사될 때, 그것이 상징적인 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비폭력 평화의 방법으로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하려는 시민의 염원을 일거에 짓밟는 폭력. 진화한 21세기의 시민을 막아서며 대치한 것은 여전히 20세기의 정치권력이었다. 도대체 누가 시민이 낸 세금으로 그들에게 물대포를 쏘랬나. 도대체 누가 우리 아이들을 군홧발로 짓밟으랬나. 방패로 찍으랬나. 도대체 누가! 20세기를 참으로 힘들게 통과하며 내내 우리를 괴롭힌 그 ‘누군가들’의 망령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다. 대통령도 알고 계실 우리의 상식.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 가장 중요한 헌법기관은 바로 여기, 살아 숨쉬는 시민의 몸과 마음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몸과 마음이 법의 원천이다.

6월로 접어들며 시위에서 ‘독재 타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독재냐고? 나는 ‘독재 싫어!’를 외치는 보송보송한 아이들의 뺨을 바라보며 눈이 부시다. 촛불광장에서 놀던 아이들은 알아채 버린 것이다. 독재는 멀리 있지 않다는 것. 하드웨어적인 독재의 시대가 끝났다고 해서 우리 내부의 독재가 자동 소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국민을 섬겨야 할 정부가 섬김은커녕 귀 막은 채 국민을 윽박지른다면 그것은 독재다. 나는 소프트웨어적인 독재의 변모를 민감하게 감지하는 아이들의 촉수에 다시 한 번 놀란다. 정치에 대한 학습이 전무한 저 아이들이 ‘독재’를 입에 올릴 때, 그것은 ‘생명의 감각’이다. 자신들의 오늘과 미래를 옥죄려는 거대한 힘에 대한 본능적이고 때 묻지 않은 거부. 당파적 이익이나 이데올로기와는 무관한 이 거부를 그저 단순하고 즉자적인 ‘어린애들’의 것이라 폄하할 수 있을까. 이것은 오히려 새로운 민주의 가능성, 민주의 진화 현장이 아닐까.

시청 광장에 모이는 한 사람은 열 사람이고 백 사람이다. 그곳에 자주 가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한 명의 연행자는 백 명의 연행자다. 당부하건대, 누구든지 단 한 사람도 구속하지 말길 바란다. 2008년 봄의 촛불 속에서 태어난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구속된다면 이 정부는 정말로 독재란 오명을 벗지 못할 것이다. 머리털 하나 손끝 하나도 다치게 하지 말라. 이 나라의 주권자는 촛불을 가슴에 품은 바로 이곳의 우리다.

김선우 시인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