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07.31 19:57
수정 : 2008.07.31 19:57
|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
세상읽기
무더웠던 그저께 오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내 뒤에 선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선 이에게 부채질을 해주면서, “바람이 오냐?” 하고 물었다. 내 앞의 여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하게 “응!” 하고 답했다. 친구 사이거나 자매간인 듯했다. 한동안 느긋한 부채질이 계속되었고 덕택에 나도 공짜로 부채바람을 쐤다.
열차가 오자 두 사람은 “잘 가라”며 헤어졌는데 내겐 그 부채바람이 시원하면서 따뜻한 느낌으로 남았다. 부채바람 자락에 ‘시원하다/ 따뜻하다’라는 상반된 느낌이 한데 엉킬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 까닭을 헤아려 보니 “바람이 오냐?”라는 말 때문인가 싶었다.
만일 그가 “바람이 가냐?”라고 했다면 시원이야 했겠지만, 따뜻하기까지야 했으랴 싶은 것이다. “바람이 가냐?”는 “내가 부쳐주는 바람이 시원하냐?”는 뜻이다. 그 바람의 주인공은 ‘나’인 것이다. 반면 “바람이 오냐?”에는 부쳐주는 ‘나’는 없고 바람을 쐴 ‘너’만이 존재한다. 상대에 대한 염려와 사랑만이 들어차 있기에 시원하면서도 따뜻한 ‘역설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는 것. 지하철 역사의 찌는 더위가 몇 번 살랑거리는 부채바람에 얼마나 가셨을까마는, 이를 통해 더위는 피부로 와 닿는 것이지만 외려 마음으로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여름 더위를 더 견디기 힘들게 만드는 것이 도로를 향해 삐쭉 내민 에어컨 주둥이들이다. 길 걷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내뿜는 에어컨 열기 속에는 닫힌 마음, 밀폐된 ‘나’가 가득 들어차 있다. 에어컨 속에는 ‘우리’가 없고, 고작 ‘나’만 존재할 뿐이다. 그 닫힌 마음가짐이 읽히기에 훅 쏟아지는 에어컨의 실제 온도보다, 우리 마음속에서 욱 치솟는 원망의 열기가 더 뜨거운 것이다.
부채와 에어컨은 다르다. 에어컨이 일방적이라면 부채는 쌍방적이다. 또 에어컨이 닫힌 공간을 요구한다면 부채는 열린 마당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에어컨이 이기주의·자기중심주의에 갇히는 구조로 오그라든다면 부채는 ‘우리, 함께, 서로’라는 공동체주의로 나아간다. 나만을 시원하게 만들려는 에어컨식 실용주의는 모든 이로 하여금 문을 처닫게 만들고, 무책임하게 바깥으로 내뱉는 열기는 서로를 미워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에어컨은 증오를 낳고, 부채는 사랑을 잣는 도구라고 해도 좋다. 제 한 몸의 시원함을 위해 다른 사람을 더욱 덥게 만드는 에어컨의 여름과, 조금이라도 남과 시원함을 나누려는 부채의 여름은 이렇게 다른 것이다. 더위는 피부에 닿는 열기뿐만 아니라 가슴속에서 치솟는 짜증에서도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꼭 부채와 에어컨 탓이기만 할까? 부채는 이렇게 선하고 에어컨은 저렇게 악하기만 한 것일까? 지하철역에 서서 지나가는 열차를 보고 있자니 ‘약냉방차’라는 이름을 단 칸이 눈에 들어왔다. 찬바람에 상할 노약자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배려심이 ‘약냉방차’라는 말 속에 배어 있다.
문명이란 말이 어디 편리함만을 두고 붙인 이름이랴. 도리어 상대에 대한 섬세한 배려, 그 속에 문명의 성숙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부채와 에어컨이 아니다. 핵심은 도구가 아니라 그걸 쓰는 우리네 마음가짐과 태도에 달린 것이다.
나는 그 친구분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난 뒤 한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다음 열차의 ‘약냉방차’를 골라 탔다. 그곳도 시원하면서 또 따뜻했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광고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