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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03 21:40 수정 : 2008.08.03 21:40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세상읽기

자기의 생각이나 행동을 무리하게 관철해 보려는 고집을 ‘억지’라고 한다. 한국 외교가 요즈음 이 억지스러운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난 7월 아세안지역포럼(ARF)에서 정부는 의장성명에 금강산 피격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기대한다는 문구와 함께 북한이 요청한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의 합의문인 10·4 선언에 대한 지지 표명이 포함되자, 이미 발표된 성명에서 10·4 선언 관련 문구를 삭제하려고 시도하다가 양쪽 모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무엇보다도 금강산 피격사건을 근본문제로 부각시키며 국제화를 시도하던 정부가 10·4 선언의 명기를 막기 위해서 금강산 관련 문구를 희생타로 날렸다니 정략적이며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거기에 금강산 문제를 포럼에서 제기하는 것은 성과를 거두기 어려운 반면, 한국의 위상만 분쟁의 당사자로 격하시키게 되리라는 반대론에도 아랑곳없이 정부가 이를 강행하여 결국 목표 달성에는 실패하고 8년 전 남북 외무장관이 만나 최초로 국제협력을 약속한 바로 그 포럼에서 적대적 경쟁외교를 재연하였다.

그것은 6자 회담에서 미국·중국·북한을 오가며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고,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했으며, 유엔 개혁과 관련해 일본을 중심으로 한 상임이사국 증대 주장을 당당히 좌절시킨 ‘커피클럽’의 중심 국가였던 한국을 한순간에 하찮은 분쟁국가로 전락시킨 ‘참사’였다.

이번 포럼 의장성명에 10·4 선언 지지가 들어간 것은 2000년 회의에서도 그 직전에 있었던 6·15 공동선언에 대한 강력한 지지표명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볼 수 없었다. 더욱이 10·4 선언은 이미 지난해 말 미국을 포함한 전체 유엔 회원국이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지지 결의한 문서이며, 우리 국민의 75% 안팎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남북 합의문이다. 그러니 북한이 요청했다고 해서 포럼이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7월 말 테헤란에서 열린 비동맹회의에서는 “정부가 노력한 결과” 최종 문서에 “6·15 공동선언, 10·4 선언, 그리고 모든 남북 공동성명 및 합의서”를 지지한다는 문구를 명기했다고 한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이 배타적으로 명기되는 것을 막았다는 얘기다. 참으로 한심하다. 모든 남북 합의를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리고 남북 합의문의 85% 이상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 과정에서 나왔다. ‘억지춘향’ 식으로 기존의 남북 합의를 나열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나? 오히려 비동맹회의 문서처럼 정부도 이제는 다른 남북 합의들처럼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을 지지하고 계승하느냐고 묻는 것이 빠를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 외교관들이 머나먼 테헤란까지 가서 왜 그런 수고를 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계승의 핵심은 화해와 평화번영을 향한 남북의 공동 의지를 담고 있는 이 선언들의 기본정신과 방향을 인정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10·4 선언을 계승하면 천문학적인 재원이 들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나, 과장된 주장이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업내용은 필요하면 북한과 협의하여 조정하면 된다. 정부는 이길 수 없는 패를 들고 억지를 부려서 국익을 더는 훼손하지 말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익의 수호자로서 유엔과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은 남북 정상선언들을 계승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지, 정파적인 잣대로 기각시킬 권리는 없다고 본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이번 8·15를 계기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계승을 공식 천명함으로써 부질없는 ‘억지외교’를 종식하기 바란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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