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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8.14 21:03 수정 : 2008.08.14 21:03

김형경 소설가

세상읽기

영화 ‘괴물’의 도입부에는 한 사내가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 인물은 다리 난간에 상체를 깊숙이 숙인 채 기대 서 있다가, 개인적 어려움에 대해 중얼거리는 듯하다가 무거운 자루가 미끄러지듯 한강 속으로 스며든다. 금세 고요해지는 강물처럼 영화는 그 에피소드에 대해 침묵한 채 다른 서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한강변에 삶의 터전을 가진 가족의 일상과 바로 그 한강에 나타나서 삶을 파괴하는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정신분석학에서 괴물은 우리 내면에 있는, 그러나 우리가 바로 보고 인정하지 못한 억압된 것들의 귀환으로 본다. 인정하지 못하는 내면의 공격성, 두려움, 불안감 따위가 무서운 형상이 되어, 혹은 낯선 사람이 되어 당사자에게 돌아온다. 영화 ‘괴물’에서 괴물은 도입부에서 죽은 인물을 사소하게 흘려보낸 바로 그 지점에서 잉태된다. 일상을 위태롭게 하는 사회에 대한 불안, 그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공포, 죽은 이에 대해 못다한 애도. 그런 감정들이 내면에서 억압된 뒤 외부로 쫓겨난 다음 괴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여고 괴담’ 시리즈처럼 학교에 유난히 귀신이 많이 사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사춘기는 심리적으로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가는 시기이다. 부모의 권력에서 벗어나는 불안감, 그런 자신을 부모가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새롭게 동일시해야 하는 친구들과의 갈등이 내면에서 부글거린다. 그 감정들의 정체와 처리법을 모르는 청소년들은 그것을 질풍노도의 행동으로 표현하거나 온 힘을 다해 억누른다. 억압된 감정은 한 명의 희생자에게 쏟아지고(모든 집단은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타자가 되어 죽은 친구는 무서운 형상의 귀신으로 돌아온다. 남학교보다 여학교에 더 많은 귀신이 사는 이유는 여성의 공격성이 더 많이 억압되는 사회적 분위기와 관련 있을 것이다.

“괴물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괴물과 화해하는 것이다. 괴물이 떼어낼 수 없는 우리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괴물을 길들일 수 있고, 괴물에게 덜 추동당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면한 감정들을 온전히 체험하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이방인(타자)이라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철학자 리처드 커니의 말이다(<신, 이방인, 괴물>). 그는 또한 괴물에 대한 두려움을 타자에게 다시 투사시키는 방식으로 공포를 현실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수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 속 괴물은 죽지 않는다. 속편을 예고하는 대사를 남겨둔 채 사라질 뿐이다. 인간 내면에는 원초적 불안과 공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괴물은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진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공동체 구성원이 두려워하는 권력의 대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괴물의 폭력성은 그 사회에 통용되는 이분법적 가치관과 비례한다. 세대나 이념 갈등, 지역감정이나 인종차별주의가 클수록 괴물의 성격은 파괴적이다. 불안한 사회가 더 많은 괴물을 낳고, 두려워하는 사회가 더욱 공격적인 괴물을 창조한다.

극장가에 괴물, 괴담이 쏟아지는 계절이다. 자기 내면의 괴물과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스릴러나 괴담을 따라가면서 공포와 불안을 다스린다. 그와 같은 은유적, 무의식적 작업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그런대로 평화로울 것이다. 올해 극장가에는 눈에 띄는 괴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따금 ‘아이엠에프 괴담’이 들리기는 하지만 그것마저 어쩐지 서사가 빈약하다. 공포심을 은유화하는 기능이 위축된 것인지, 공격성이 현실에서 직접 표출되는 ‘공포의 현실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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