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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4 20:42 수정 : 2008.09.04 20:42

김형경 소설가

세상읽기

사회에 통용되는 개념 중 간혹 동의할 수 없는 게 있는데, 그중 하나가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이다. 물론 그 구호가 해병대의 남다른 용맹스러움과 긍지, 조국애를 영원히 간직하자는 정신에 관한 것임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머리가 흰 해병대 할아버지가 도로 한가운데서 교통정리 하시는 모습은 보기에 위험하다. 거리에서 ‘해병대 전우회’ 간판이 달린 낡은 컨테이너 건물을 보는 일은 쓸쓸하고, 기둥에 ‘해병대 전우의 집’이라는 팻말이 붙은 세탁소의 배 나온 주인은 왠지 어색하다. 한 번 공군은 영원한 공군이 아니고, 한 번 대통령도 임기만 지나면 ‘전직 대통령’일 뿐인데, 왜 해병대만은 영원히 해병이고자 할까? 가끔 그것이 궁금했다.(해병대 장병과 해병대 전우회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위 글은 사례로 제시된 것일 뿐,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분들께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진화론의 핵심이 ‘진화하거나 멸종되거나’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진화론을 인간의 삶에 적용하면 ‘변화하거나 도태되거나’라는 사실도 널리 수용되는 정의다. 인간은 발달 단계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화해야 할 시기를 맞는다. 성인기 초입에는 유년기와 청소년기 동안 만들어 가진 의존적이고 나르시시즘적인 생존법을 버리고 성인의 정체성과 생존법을 습득해야 한다. 중년이 되면 청춘기의 꿈과 힘에 대한 욕망을 떠나보내고 중년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 노년이 되면 평생을 총정리하면서 다가올 죽음에 대비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매순간 지난날의 자신을 떠나보내며 살아야 한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위기를 맞는다. 성인이 되어서도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생존법을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경쟁에서 도태된다. 중년의 위기를 맞는 사람들은 청춘을 떠나보내지 못했기 때문이고, 노년에 맞는 위기는 자신의 권력과 심리적 존재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지 못한 결과이다. 반대로, 외부에서 위기가 올 때 그것을 변화와 성장을 요구하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가 필요한 순간에 마비되거나 퇴행하는 경향이 있다. 외환위기(IMF) 시절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번졌던 ‘친구 찾기’ 열풍은 퇴행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보인다.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찾아내어 오프라인에서 만나며 즐거워했다. 그 행위에는 현실의 불안으로부터 도피하여 갈등도 책임도 없던 유년의 평화 속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퇴행 욕구가 엿보였다. 경제위기가 끝나자 거짓말처럼 친구 찾기 열풍은 가라앉았다. 해병대 이야기로 돌아가면, 해병대 시절은 빛나는 젊음과 용맹스러움이 결집된 남성다움의 정점이어서,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라는 말에는 옛 영광에 묶여 성장이 정지된 영웅이 보인다. 영광의 배경에는 그것을 얻기 위해 치러야 했던 혹독한 훈련의 트라우마도 중첩되어 보인다.

개인뿐 아니라 사회조차 변화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불안감 때문이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위기설이 떠돈다. 낡은 가치와 생존법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면 불안감 없이 대처할 수 있을 텐데, 실제로는 위기설보다 더 빠르게 불안감이 확산된다. 저마다 지난날의 영광과 상처를 끌어안고 낡은 갈등을 되풀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현대 정신분석학자 오토 컨버그는 자아 건강의 조건을 세 가지 꼽았다. 불안을 견딜 수 있는 용기, 충동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승화 역량의 발달.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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