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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9.07 21:10 수정 : 2008.09.07 21:10

김영환 한국인권재단 감사

세상읽기

얼마 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소비자들에게 “대체에너지를 활용하거나 환경친화적인 제품을 구매할 의사가 있는가” 물어보았다. “품질이나 가격조건이 다소 불리해도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20%이고, “품질이나 가격조건이 같다면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56%, “가려서 구매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사람이 24%였다. 이 구매의사의 차이는 좀 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관심을 갖는 이익의 범위의 차이다.

첫째 부류의 사람은 관심을 갖는 이익의 범위가 공동체나 생태계에 널리 퍼져 있는 사람이고, 둘째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이익과 자신 아닌 존재의 이익이 우리말의 초성과 중성처럼 배치된 사전편찬식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셋째 부류의 사람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관심을 갖는 이익의 범위가 넓은 것이 좋은가 좁은 것이 좋은가를 따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심을 갖는 이익의 범위가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이 조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각각 무시되어서는 안 될 규모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차이는 한 부류가 다른 부류를 설득하는 등의 비교적 간단한 방법으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의식적 권력 동기가 강한 사람은 시합에서 졌을 때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의 수치가 높아졌으나, 권력 동기가 약한 사람은 시합에서 이겼을 때 높아진다는 실험결과를 비롯한 여러 심리실험들은 권력 동기나 관심을 갖는 이익의 범위의 차이가 생리적 뿌리를 가지는 공고한 것임을 보여준다.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섞여 사는 상태는 종종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 다른 존재의 이익에 널리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는가” 하고 분개하기 쉽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이기적이냐 이타적이냐 하는 관점에서 보지 말고, 관심이 응어리진 형태로 존재하느냐 펑퍼짐한 형태로 존재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엄밀히 살펴보면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이기니 이타니 하는 말도 편의적인 말에 불과하다.

다른 존재의 이익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고 사는 것 같다.

“금번 세제개편 조치가 … 침체된 우리 경제에 활력을 넣고 경기 선순환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되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런 목적으로 했는데 반대의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고소득층에게서 세금을 많이 받아서 저소득층에게 많은 세출을 하는 그것은 오래전부터 주장되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한 국가도 많이 있습니다만, 심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준을 넘는 고세율은 경제를 전체적으로 좋지 않게 만들었고 일자리도 줄어들게 만들었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다 나와 있습니다. 가장 극단적으로 한 것이 사회주의에서 고소득층을 전부 다 몰수를 해서 ….”

자신이 장관으로 있는 기획재정부에서 이번에 세제개편안을 발표하면서 배포한 설명서를 보면 한국의 조세부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보다 4.2%포인트 낮다. 재정적자까지 고려한 잠재적 조세부담률은 주요 7개국(G7) 평균보다 5.9%포인트나 낮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심리적으로, 현실적으로 감내할 수준을 넘는 고세율’이라는 표현은 경제장관의 발언으로는 엽기적인 수준의 발언이다. 갑자기 사회주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걸핏하면 빨갱이 운운하는 ‘댓글 알바’를 떠올리게 한다.

그냥 공공의 이익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좋겠다.


김영환 한국인권재단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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