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1.06 20:11
수정 : 2008.11.06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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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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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로맹 가리의 아름다운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에는 유대인식 극성 엄마가 등장한다. 그녀는 어린 아들에게 위인전과 고전을 읽어주며 주술에 걸릴 만큼 되풀이해서 말하곤 한다. “너는 위대한 예술가가 될 거야. 너는 바이올리니스트, 시인, 배우가 될 거다.” 그녀는 아들의 재능을 알아보기 위해 테니스, 피아노, 연극 코치들에게 테스트를 받게 한다. 아들에게 유일하게 글쓰는 재능밖에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 뒤에는 모든 열정을 그곳에 집중한다. 엄마는 날마다 조금씩 아들에게 글을 쓰게 하고 아들은 엄마 앞에서 그날 쓴 글을 읽는다. 엄마는 감탄하고 극찬하면서 또 주술을 건다. “너는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가 될 거다. 아름다운 여배우와 결혼해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프랑스를 위해 일하고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을 거야.”
요즈음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라는 용어가 자주 들린다. 외모, 재능, 실력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엄마 친구의 아들로서, 엄마가 자신과 비교하는 존재를 일컫는 말이라 한다. 엄친아라는 말을 듣자 문득 격세지감이 느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엄마들에게는 ‘나쁜 친구’가 있었다. 자식이 무슨 일을 저질러도 그것은 단지 나쁜 친구 꾐에 빠져 그런 것이지, 내 아들은 절대 그런 아이가 아니라고 감싸는 엄마였다. ‘엄친아의 엄마’와 ‘나쁜 친구의 엄마’는 심리적 배경이 달라 보인다. 앞의 엄마는 자식을 남과 비교하고, 자식의 역량과 미래를 불안해하는 엄마일 것이다. 자식을 자기 뜻에 맞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통제하고 조절하는 엄마일 것이다. 뒤의 엄마는 자식의 심성이 선하고 바르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는 엄마일 것이다. 아들의 어떤 행동도 무조건 포용하고 지지하며, 아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엄마일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은 아이의 심리적, 정서적 탄생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에 대해 꾸준히 연구해 왔다. 윌프레드 비온은 ‘담아주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엄마는 아이가 혼자 처리할 수 없는 불안이나 분노의 감정을 대신 담아서 심리적으로 신진대사시킨 다음 위험하지 않은 형태로 되돌려주는 기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의 담아주기 역할을 동일시하면서 분노와 불안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도널드 위니콧은 ‘안아주기’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엄마는 아이가 위험한 감정을 표출하거나 심리적으로 무너질 때, 안전하게 받쳐주는 울타리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울타리 안에서 안전함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아이는 건강하고 자율적인 인간으로 성장한다.
위 개념들에 비추어 보면 엄친아의 엄마보다는 나쁜 친구의 엄마가 자식의 발달에 유용해 보인다. ‘나쁜 친구의 아들’은 엄마의 절대적 지지와 신뢰 속에서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엄마의 믿음과 소망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조용히 노력하기도 할 것이다. ‘엄친아의 아들’은 지속적으로 비교 평가 당하는 일에 화가 나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결과에 좌절하고, 결국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아들이 될지도 모른다.
<새벽의 약속>에서, 소년의 옆집에 살던 노인은 어느 날 소년에게 이렇게 말한다. “넌 정말 중요한 인물이 될지도 몰라. 어머니들은 그런 것을 느끼는 법이거든.” 로맹 가리는 어머니 말대로 훌륭한 작가, 프랑스 공사가 되었고 아름다운 여배우 진 세버그와 결혼했다. 또한 영토해방 십자훈장, 레지옹 도뇌르 약장, 공쿠르상을 받았다. 리더십 분야에서는 어머니들의 그런 말을 ‘자성(自成) 예언’이라고 일컫는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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