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8.11.13 19:51 수정 : 2008.11.13 19:51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세상읽기

돌아가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독난리가 무섭지, 몰난리는 무섭지 않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다. 남들이 겪지 않는 재난을 혼자 당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함께 겪는 어려움은 도리어 두렵지 않다는 말이다. 전쟁이나 큰불로 사람이 죽고 다치는 것이 몰난리라면 인터넷의 모진 댓글로 자살에 이른 연예인의 처지는 독난리에 속할 것이다. 전쟁의 재난이 무섭다고는 하나, 제 목숨을 스스로 끊게 만드는 고통만큼 지독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독난리를 두려워하기로는 맹자만 한 이가 있을까. 그가 살던 때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그때가 얼마나 처참했던지는 전국(戰國) 곧 ‘나라끼리 전쟁하는 시대’라는 이름에서 명징하다. 맹자는 그 시대 상징어를 독(獨)으로 압축했다. 정치는 독재로, 경제는 독점으로, 언어는 독단과 독선으로 집중한 시대였다는 것. 문제는 천하통일이라는 독점의 욕망, 곧 탐욕이 인간을 둘러싸고 있던 관계망인 가족을 파괴하고, 제각각 외톨이로 해체시키고 만 데 있었다. 맹자는 이 사태야말로 사람의 역사 가운데 최악의 재난으로 보았다.

당시 사람들이 겪던 참혹한 살육과 전쟁을 몰난리라고 한다면, 관계망을 잃고 제각각 외톨이가 되어 당하는 고통은 독난리가 된다. 이에 그는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괴로운 사람이 넷 있는데 그 첫째가 홀아비요, 둘째가 과부며, 셋째가 고아요, 넷째가 독거노인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정치는 독난리를 겪는 이 네 종류의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이 몰난리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세계적 차원’의 경제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제는 이것이 ‘실물경제’에까지 미쳐 개개인의 생존까지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욱이 금방 끝날 사태가 아니라니 더 큰일이다. 한데 이 몰난리의 단초가 금융 자본가들의 탐욕에서 비롯되어 파생상품을 만든 수학적 기술의 도움을 받아, 신뢰의 위기로 이어졌다는 진단은 의미심장하다.

‘나만 잘살겠다’는 욕망이 탐욕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탐욕을 부채질하는 체제이며, 기술은 탐욕을 실현하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라는 점이다. 그동안 우리는 내내 탐욕과 기술을 발전과 진보라는 이름으로 찬양해왔으며 학교는 탐욕의 기술을 가르치고 기르는 데 복무해왔다. 그러니까 오늘의 사태는 우리 혀를 제 스스로 깨문 셈이다.

맹자라면 이번 참의 몰난리와 독난리 사태를 극복할 대안으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첫째 인간의 탐욕은 사람을 개체로 보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인간(人間)이란 곧 ‘사람과의 사이’로 이뤄진 존재라는 생각을 가질 때 ‘나만의 욕망’인 탐욕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할 터다. 둘째 기술은 필요하지만 공공재로서 통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국가의 책무라고 그는 권할 것이다. 셋째, 신뢰는 모든 사회의 핵심성분이다. 신뢰를 깨는 원흉이 ‘홀로’이므로 이것은 ‘더불어·함께’를 지향하는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고 제안하리라. 곧 그는 이번 사태를 기화로 ‘자본이 사람을 잡아먹는’ 자본주의의 근본 속성, 그 자체에 대한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를 요구할 것이다.

할머니에게 몰난리가 무섭지 않았던 까닭은 ‘콩 한쪽도 나눠 먹고’ ‘덕을 베푸는 이는 외롭지 않고, 반드시 그 이웃이 있게 마련’이라는 전근대적 공동체 윤리가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원로 영문학자 김우창이 “조선 말기 지식인들이 왜 근대를 거부하고, 전근대에 머물기를 고집했는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던 조언도 연이어 머리를 스친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