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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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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이명박 정권의 역사를 향한 삿대질이 점입가경의 경지에 들어서고 있다. 교과서 시비와 과거사 죽이기에 이어 27일부터는 서울시 교육청이 현대사 특강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모두 146명의 ‘뜻있는’ 인사들이 강사로 나섰다는데, 참여정부 시절 공공연히 군부 쿠데타를 선동한 사람이 있질 않나, 북진통일의 옹호자가 있질 않나 별별 사람이 다 들어 있다. 그런데 명색이 현대사 특강인데 눈 씻고 찾아봐도 한국 현대사 전공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한국의 현대사 연구가 아무리 늦게 출발하고, 빈약하다 해도, 그래도 대학에서 한국현대사를 가르치는 사람이 수십 명은 되는데 아무도 연락을 받지 못한 모양이다. 70년대식 시국안보 대강연회나 반공 궐기대회 체험학습도 아니고, 중앙정보부 간부나 군 출신 인사들에게 현대사를 배워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프다. 이명박 정권이 초·중·고와 싸우고 촛불과 싸우더니 이제 역사를 향해 삿대질을 해댄다. 뉴라이트들은 친일파를 ‘문명의 아버지’라 미화하고,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고, 박정희는 ‘근대화의 아버지’라 부른다. 얼마 전 국방부가 발표한 근현대사 교과서 수정안을 보면, 전두환마저 친북 척결의 아버지로까지 미화하고픈 모양이다. 아버지가 많아 참 행복하겠다. 뉴라이트들은 역사학자들이 이 수많은 ‘아버지’들을 비판하면 ‘부친 살해’라고 악을 쓴다. 부친 살해에서 중요한 전제는 살해의 대상이 된 ‘아버지’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히 해 두자. 나는, 그리고 수없는 금기를 깨뜨리며 온몸으로 현대사를 공부해 온 한국현대사 전공자들은 이승만의 아들딸이 아니고, 박정희의 아들딸이 아니다. 뉴라이트들이 거품을 물고 ‘부친 살해’라고 떠드는 제주 4·3 항쟁이나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 등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의 재조명은 ‘부친 살해’가 아니다. 이승만 등에 의해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사람들이 아버지의 지워진 이름을 한국현대사에 다시 새겨 넣는 눈물겨운 작업일 뿐이다. 이명박 정권은 더 이상의 ‘부친 살해’를 막기 위해 나름대로 ‘의식화’에 나선 것 같다. 그런데 현대사 특강이 시작되고 처음 며칠 학교 풍경을 보니 쓴웃음만 나온다. 3억원짜리 수면제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강연 사진을 보면 ‘구국의 일념’으로 열변을 토하는 강사의 바람과는 달리, 학생은 반 이상 자고 있거나, 깨어 있다 해도 문자 보내거나 잡담을 하는 등 시간만 때우고 있다. 한 시간짜리 강연으로 학생들의 의식이 얼마만큼 바뀔 수 있을까? 70, 80년대 철저한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들이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열혈운동권으로 바뀌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 이명박 정권이나 수구세력들은 ‘의식화’의 힘을 너무 믿는 것 같다. 70, 80년대의 ‘의식화’가 근사한 말-이번 특강 내용을 보니 별로 근사하지도 않았지만-몇 마디로 이루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을 확 깨게 만드는 현실이 있었고, 고통 받는 형제들이 있었고, 또 그 말을 전해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맥락 없이 시대착오적인 지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고 생각이 바뀌겠는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제헌헌법을 읽히도록 하자. 사기업의 노동자는 이익분배 균점권을 갖고, 중요 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하고, 천연자원은 국유화하고, 개인의 경제상 자유는 모든 국민에게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한다는 범위 내에서만 보장되고,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할 수 있게 한 그 헌법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한겨레 주요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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