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10 11:43
수정 : 2008.12.10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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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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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 달이 넘게 감기가 낫지 않는다. 몸이 아프니 만사가 자우룩하다.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나을 듯하다 주저앉기를 반복하니 시난고난 몸속이 어지럽다. 뉴스를 줄인다. 자구책이다. 신문기사는 읽지 않고 아홉시 뉴스는 이따금 더운 차를 끓이며 건성으로 흘려듣는다. 바깥의 안테나를 가능한 한 차단한다. 20년 전으로 회귀한 듯한 정치·경제·사회가 무섭고 흉흉해서 어째볼 도리도 힘도 없는 글쟁이가 세상의 뉴스를 챙겨 들은들 몸의 화기만 도진다. 최소한으로 열어둔 세상과의 안테나에 잡히는 이웃들의 소식도 긴 한숨들이니 도처에 아픈 것들투성이다.
병원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의 긴 담장, 나무들이 심어진 철제 담장의 덩굴무늬 안쪽에서 말이 흰 개지 누런빛이 더께 앉은 더러운 흰 개의 얼굴이 보였다. 오랫동안 바깥을 떠돌며 산 게 분명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이 사라졌다. 사람에게서 한 번 버려진 개들은 사람을 무서워한다. 사람을 피하고, 때로 공격적이다. 버려졌던 존재가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기까지는 스스로를 사랑하려는 의지와 외부로부터의 지극한 사랑의 연대가 모두 필요하다. 잠시 마주쳤던 개의 눈빛이 맺혀서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담장 끝으로 갔다. 개는 없었다.
가깝게 지내는 나이 어린 친구가 생각났다. 그 애의 개 이름은 신동. 아이엠에프 이후 가세가 기울어 서울 인근 변두리의 허름한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신동이가 찾아들었단다. 털은 한 번도 안 자른 듯하고 목욕은 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똥강아지. 누군가 이사를 가면서 버린 개였다. 신동이와의 동거가 시작된 어느날 신동이가 사람만한 덩치의 개한테 물려서 질질 끌려 왔다. 동네병원을 다 돌아다녔는데 의사마다 안락사를 권했다. 살릴 수는 있지만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잡종 개를 살려놓으면 뭐하냐는 거였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 의사는 그나마 나았다. 그도 안락사를 얘기했지만 적어도 잡종견에 대한 폄하는 없었다. 내 친구는 결국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동물병원을 알려달라고 했단다. 안락사를 결정하게 되더라도 최선을 다한 후에 하고 싶다고. 이미 한 번 버려졌던 강아지인데 또다시 버려지듯 죽으면 안 되지 않느냐고. 그래서 찾아간 서울의 병원은 꽤 친절했고 그곳에서 신동이는 간신히 살아났다. 그 당시 한달 월급 60만원을 받던 내 친구는 신동이의 치료비용으로 한달치 월급을 고스란히 썼다. 그후 신동이의 심장사상충 치료를 위해 월급보다 많은 100만원을 카드 할부로 갚으면서도 내 친구는 그 모든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때 20대 중반이던 그 애가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사람도 아닌 강아지인데 너무 오버액션 아니냐는 주변의 말을 들을 땐 힘들더라고. 하지만 적어도 한 생명 앞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다른 생명, 그것은 내 것이 아닌데, 남의 것인데, 어떻게 함부로 할 수 있죠?”
우리는 흔히 착각한다. 내가 돈을 주고 강아지나 식물을 사면 그 생명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경쟁에 이겨서 나라의 고위 공직자가 되면 나라가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는 착각까지. 그러니 제 맘대로 주물러도 된다는 독단이 횡행한다. ‘내 돈으로 내가 사업하는데!’라는 착각이 악덕 경영주를 만들고, 가정을 내 소유물로 착각하는 가장에게서 폭력이 발생한다. 세상에 영원히 내 것인 것은 없다. 아프니 잘 보인다. 이 몸도 실은 빌려 쓰는 것. 빌려 쓰는 것이니 잘 돌봐야 한다. 하물며 남의 것은 더더욱 존중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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