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8.12.30 21:25
수정 : 2008.12.30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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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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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마음의 스승이 되는 스님이 몇 분 계신다. 그 중 한 분 얘기다. 내가 아직 이십대였던 어느 해, 산사에 찾아가 머물 때였는데 어디선가 포장이 몹시 꼼꼼하게 된 소포가 왔다. 가위를 찾아 포장된 끈을 자르려고 할 때 스님이 말씀하셨다. “끈은 자르는 게 아니라 푸는 거다.” 포장 끈의 매듭을 푸느라 한동안 끙끙거리며 나는 짜증이 났다. 가위로 자르면 편할 걸 별것 다 나무라신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나는 끙끙거리면서도 결국 매듭을 풀었다. 다 풀고 나자 스님 말씀, “잘라 버렸으면 쓰레기가 됐을 텐데, 예쁜 끈이니 나중에 다시 써먹을 수 있겠지?” 천진하게 웃으시더니 덧붙이셨다. “잘라내기보다 푸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인연처럼!”
12월 중순에 홍대 앞 클럽 ‘빵’에 갔다.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 후원의 밤. 2년째 싸워 온 콜트·콜텍 소식을 간간이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는데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아직 못 들어본 분이 있다면 꼭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길. 부의 윤리에 안하무인인 천박한 부자 하나가 저지르는 전쟁과도 같은 악행들, 한 우두머리의 탐욕이 수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고통으로 몰아가는지 현장을 발로 뛰고 가슴으로 쓴 여러분의 글을 만날 수 있다.) 정작 후원의 밤에 시 한 편 낭송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될까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랴. 문학하는 내가 나눌 수 있는 가장 값진 것이 문학이니. 그런데 자그만 클럽 무대, 많은 인디밴드들의 공연에 이어 시를 낭송하는 순간 나는 알았다. 현실의 고통 앞에 시 한 편을 나누는 이러한 미미한 연대를 통해서도 사람들은 큰 위로와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을. 고통의 소소한 연대가 사랑을 깨우치고 발전시키며 그것이 우리를 기어이 살게 하는 힘이라는 것. 지나온 내 모든 고통에도 말없이 연대해 준 인연들이 있었다는 것. 비록 그 순간 내가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기륭전자·케이티엑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싸움이 단적으로 보여주듯 임금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우리 사회 도처에는 연대해야 할 고통이 너무도 많다. 나의 현실이 아니라 그들의 현실인데 일일이 어떻게 챙기겠냐고 내 마음의 한편이 속삭인다. 그것도 맞다. 동시에 틀린다. 나와 무관한 ‘그들만의 현실’이란 실은 없는 것이다. 내 생활 모두에 내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사람들의 수고가 배어 있고,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인연들이 얽혀 오늘 내가 먹고 입고 자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셈. 인간의 사회란 인연들의 총체이니 문제가 생긴 곳은 잘라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풀어서 서로를 살게 해야 한다.
글 노동을 하는 내가 기타를 만드는 노동자들과 한 편의 시를 나누던 밤, 어쩌면 나는 빚을 갚으러 그 자리에 갔을 수도 있다. 언젠가 나는 그분들이 피눈물을 삼키며 만든 기타로 연주하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곡을 듣고 위로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시의 영감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클럽 ‘빵’을 찾은 사람들의 무겁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잊히지 않는 12월이다. 엄동설한, 누군가 목숨을 걸고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면 이유를 묻고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초급 윤리다. 당연하지 않은가. 혼자 부자가 된 사람이 없듯이 우리는 모두 나 아닌 누군가의 노동에 기대어 살아간다. 노동이 즐거워지고 생기발랄해져야 우리 모두 행복하다. 세상의 건설은 아름다움과 선함에 무지한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즐거운 노동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유쾌해지라 노동이여 노래하라 기타줄이여!
김선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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