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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1.15 19:58 수정 : 2009.01.15 19:58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세상읽기

정치는 말로 이뤄진다. 정치가란 말하는 사람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임금을 뜻하는 군(君)자에 이런 뜻이 잘 들어 있다. ‘君’은 입을 뜻하는 구(口)와 우두머리를 뜻하는 윤(尹)이 합쳐진 글자이니 임금은 ‘말하는 우두머리’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고 말이 말만으로 끝나면 정치가 아니다. 말이 사람을 부리고, 또 말로써 사람조차 죽일 수 있을 때 정치가 된다.(형법의 조문이 그렇다)

한데 말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말은 상대가 들어줘야 말이 된다. 그런 점에서 말과 소리의 사이는 아슬아슬하다. 술이 취해 자꾸 허튼 말을 하면 ‘헛소리한다’고 타박받기 일쑤다. 술 취한 말이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로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소리는 짐승이 내는 것이다. 곧 사람이 헛소리를 자주 하면 짐승으로 추락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말은 정치의 자산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기도 하다.

문제는 말의 속성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숫자와 달리 말은 여러 뜻을 갖고, 또 맥락에 따라 해석도 다양하다. 그러니 공인의 말일수록 정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정치가의 언어는 단순하고, 명확하며, 많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공자가 정치의 출발을 정명(正名), 곧 올바른 단어의 사용부터라고 지목한 것도 정치가의 말이 객관적이고 정밀해야 바로 알아듣고 또 일이 제대로 처리되기 때문이었다.

새해 들어 정부는 녹색을 정책이념으로 제시하였다. 녹색으로 정책방향을 잡은 것은 옳아 보인다. 문제는 녹색이란 말뜻이 모호하고 또 남발되는 데 있다. 녹색뉴딜, 녹색성장, 녹색아이티(IT) 같은 표현들이 마구 쏟아진다. 한데 녹색을 위해 뉴딜을 한다는 것인지, 뉴딜을 하려고 녹색을 붙여놓았는지조차 모호하다.

그 실천방안들을 보면, 에스오시(SOC)며, 정보분야며, 지식분야 등이 두서없이 ‘녹색’, ‘그린’이라는 접두어를 달고 나열돼 있다. 어떤 당국자는 “교육도 녹색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라면 녹색 아닌 것이 없게 된다.

정치가 말로 이뤄지지만, 정치가 말을 만들지는 못한다.(말 만들기는 권력자들의 염원이지만, 대부분 실패한다) 말은 사회가 만드는 것이다. 사회가 만든 말을 바로 써서 소통시키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반면 정치가 말을 오염시키면 사회는 혼란하고 공동체는 타락한다. 전두환 정권이 썼던 민주정의당이라는 이름이 그렇지 않았던가. 국민을 죽인, 피 묻은 손으로 오염시킨 민주와 정의라는 말이 이 사회를 얼마나 혼란에 빠뜨렸으며, 그 말뜻을 회복하는 데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이 소용되었던가.

녹색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생산하고 유통시켜 온 소중한 자산이다. <녹색평론>이라는 잡지가 있다. 격월간이니 한 해 여섯 번 낸다. 지난해 100호를 넘어섰으니 20년 가까이 ‘녹색’이란 말뜻을 만들고 유통시켜 왔던 셈이다. 이 속의 녹색은 정부가 쓰는 녹색과 많이 다르다. 한데도 정부가 남발하듯 녹색으로 성장이 되고, 녹색으로 아이티가 되고, 건설도 녹색으로 되는 식이라면, 그동안 우리 사회에 유통되던 녹색이란 말의 함의와 맥락, 그리고 비전은 다 망가져 버린다. 이것은 곧 ‘사회적 자본’이 유실되는 것을 뜻한다.

말은 정치의 자산이요, 공동체의 화폐다. 함부로 써버리는 바람에 꼭 써야 할 때 쓰지 못한다면 큰 문제가 된다. 돈 때문에 오늘날 위기가 왔지만, 실은 돈보다 소중한 사회의 공공재가 말이다. 정부는 녹색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꾀거나 속셈을 호도하려 해서는 안 된다. 당국자들에게 <녹색평론>을 머리맡에 두고 녹색의 말뜻을 찬찬히 헤아리길 권한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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