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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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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과학 역사에서 손꼽히는 세 거인의 기념일들이 2009년에 몰려, 온누리가 떠들썩하다. 주인공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 요하네스 케플러, 찰스 다윈이다. 가장 위대한 과학자 셋을 꼽으라면 이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역사상 정상급 과학자라는 데는 아무도 이의가 없으리라. 갈릴레이(1564∼1642)는 본디 역학자였다. 1609년 우연히 망원경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본 죄로 천문학의 영웅이 되었고, 그 때문에 종교재판을 받았다. 케플러(1571∼1630)는 튀빙겐에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왜 신이 여섯 행성을 만들었을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천문학에 빠져들었다. 프라하에 가 티코의 조수가 되었는데, 그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금싸라기 같은 관측자료를 독차지하게 되었으며, 5년 사투 끝에 ‘3법칙’을 발견했다. 그 가운데 둘이 들어간 <새 천문학>이 1609년에 나왔다. 그래서 올해는 ‘국제 천문학의 해’(IYA)다. 다윈(1809∼1882)은 어려서 스포츠광이었다. 가업을 이으려 에든버러대학 의대에 들어갔으나 피를 볼 수 없어 그만두고 아버지의 권고를 따라 성공회 신부가 되려고 케임브리지대학으로 옮겼다. 그는 페일리의 자연신학을 탐독했지만 지질학·식물학에 더 관심이 많았다. 졸업 후 비글호를 타고 4년 반 동안 자연학 탐험을 한 것은 그의 일생을 결정했다. 다윈이 진화의 주요 증거를 본 것은 갈라파고스 섬에서였으나 <종의 기원>이 나오기까지는 24년의 피나는 연구가 필요했다. 150년 전이었고 다윈은 쉰 살이었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우주체계는 태양과 지구를 맞바꿔 놓았을 뿐 이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을 닮은 보수적인 것이었다. 케플러는 양적 관측을 기초로 행성의 타원궤도를 이끌어 냈고, 갈릴레이는 질적 관측과 새로운 역학을 가지고 코페르니쿠스를 강력히 지지했다. 두 사람의 기여가 없었다면 뉴턴의 천문학 혁명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8세기에 진화사상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은 선구자들의 진화론과는 확연히 달랐다. 첫째, 다윈은 처음으로 ‘자연선택’이라는 믿을 만한 진화 메커니즘을 제시했다. 둘째, 다윈의 ‘종’의 개념은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이었다. 그것은 플라톤에서 라마르크까지 내려온 타이프 개념과 과감히 단절하고 개체군 개념을 택했다. 다윈의 견해는 유전자 풀로 정의되는 현대의 종의 개념과 완전히 일치한다. 케플러는 루터파 개신교 신비주의자였다. 그는 가톨릭 지역인 그라츠와 프라하에서 두 번 쫓겨났다. 그러나 그는 루터교회의 ‘콩코드의 수식’에 서명하기를 거부해 이단으로 몰렸고, 30년 전쟁 때엔 어느 쪽에도 갈 곳이 없었다. 갈릴레이는 처음에는 예수회 천문학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성서는 글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 교황청의 경고를 받았으며, <두 가지 우주체계에 관한 대화>(1632)가 출간되자 종교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소신을 굽히고 권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전설은 근거가 없다. 그는 가톨릭교회 묘지에 묻히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다는데, 그것은 기우였다. 20세기에 들어 진보적인 교황들이 갈릴레이 재판에 대해 유감을 나타내더니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를 사면했다. 다윈의 진화론은 교회에 큰 충격이었다. 인간을 동물로 떨어뜨린 것은 지구를 행성으로 격하한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윈은 갈릴레이와는 달리 교회의 빗발치는 공격에 침묵을 지켰다. 그 자신은 진화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 신앙을 잃었다. 그는 불가지론자(예의바른 무신론자)였다. 다윈이 죽었을 때 가족장을 치르려 했는데 캔터베리 대주교가 대접이 아니라고 반대했고, 왕립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했다.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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