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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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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5만원권 종이돈이 곧 나온다고 한다. 화폐 속에는 한 나라의 가치관이 잘 들어 있다. 기본단위 지폐는 더욱 그러하다. 미국의 1달러 초상인 조지 워싱턴과 영국 파운드화의 엘리자베스 여왕 모습에서 그 나라의 정치구조와 문화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지폐의 기본단위인 천원권도 그렇다. 퇴계 이황의 초상에서 학문을 중시하고 윤리와 도덕을 지향해 온 우리 삶의 철학을 추적해 낼 수 있다. 앞면을 보면 퇴계 얼굴 옆에 흐릿하게 집 한 채가 그려져 있다. 더 꼼꼼히 보면 그 집의 현판에서 ‘明倫堂’(명륜당)이란 잔글씨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조선시대 최고 국립대학은 성균관이고 명륜당은 그 본부건물 이름이다. 그러니까 명륜당은, 요즘 식으로는 서울대학교 본관 명칭이 된다. 여기 윤(倫)이란 인륜 곧 사람관계를 뜻한다. 그러면 ‘명륜’은 사람관계를 밝힌다는 뜻이고 명륜당이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밝히는 교실’이라는 말이다. 우리 전통에서 바라보는 사람 모습은 휴대폰과 비슷하다. 기능이 제아무리 다양하고 또 보석으로 온몸을 치장한들 전화 올 곳이 없고 걸 곳이 없다면 이건 휴대폰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제 홀로 잘나고 똑똑하다 해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제대로 맺지 못하면 이건 옳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가 사람을 한자로 인간(人間)이라고 쓰는데, 실은 인(人)자보다 사이 ‘간’(間)자에 방점이 찍힌다. 상대방과의 관계를 잘 이뤄낼 때라야만 사람다움을 획득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과 함께 사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공부의 최선이며 최상이다. 주변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때라야 옳은 인간이 된다는 뜻이 명륜당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는 것이다. 최고 대학의 목표가 고작 사람관계일 뿐인가 싶어 코웃음을 쳤다가도, 곰곰 헤아려 보면 이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없지 싶다. 이렇게 놓고 보면 최근 전국 초·중등학교에서 치른 ‘일제고사’는 패륜이다. 시험 보지 않도록 기회를 준 교사는 칼같이 쫓아내면서 성적을 조작한 관료들에겐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는 짓이 우선 그렇다. 문제는 더 깊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성적 조작 잡음들이 기술적 차원의 오류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운동선수를 빼놓고, 특수학교들을 빼놓고, 성적 미달자를 돌려놓도록 만든 숨은 구조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학습부진 학생들을 위해 치른다고 해놓고 도리어 이들을 증발시킨 결과의 원인을 따져봐야만 한다. 성적 조작, 아니 학생들을 소외시키는 뿌리는 한꺼번에 모두를 통제하려는 욕망 속에 있다. 목표는 항상 감동적이다. 낙오자를 ‘위하여!’ 이 ‘위하여’ 논리가 학생과 학교를 소외시키고 교사를 도구화하다가, 끝내 위하려 했던 목표마저 사라져 버리게 하는 역설을 빚게 만든다. ‘위하여’ 논리를 바탕으로 시작한 정책은 언제나 위하려던 대상을 소외시키거나 목적 자체를 사라지게 만들고 만다. 물론 남과 ‘함께·더불어’ 사는 사람을 기르려는 명륜당의 꿈도 달성하기 힘든 목표다. 제 몫 차지하기도 힘든 형편에 남의 처지를 생각할 겨를이 보통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 경쟁과 투쟁은 가르치지 않고 그냥 놔두어도 스스로 습득한다. 그러니 국가가 가르쳐야 할 것은 오로지 함께 사는 방식일 뿐이다. 다시금 천원권을 살펴보면 한국은행 총재의 네모 도장이 명륜당 현판 아래에 꽉 찍혀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건강한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길도 명륜 위로 나 있음을 알려주는 소식처럼 보인다. 시장이든 교육이든 삶을 구성하는 원리는 똑같이 명륜, 곧 ‘함께·더불어’에 있을 뿐이라는 뜻으로 읽힌다.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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