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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19 22:31 수정 : 2009.03.19 22:31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세상읽기

유교 경전 <대학>에 나오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널리 알려진 문장이다. 대개 이것을 ‘수신을 하고 난 다음 제가하고, 제가를 한 다음 치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수신은 제가를 ‘위하여’ 존재하고, 제가는 치국을 ‘위하여’ 존재하는 식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읽으면 평천하가 제일 높고, 그다음이 치국, 그 아래가 제가요, 맨 밑바닥이 수신이라는 위계가 형성된다. 이런 식이라면 대통령은(치국) 성공한 인생이고, 가정을 꾸리는 것은(제가) 모자라거나 불완전한 삶이 된다.

하나 참뜻은 전혀 거꾸로다. 본시 저건 사람다움의 근본 바탕이 수신과 제가요, 도리어 치국과 평천하는 그 말단이라는 뜻이다. 사람됨을 닦는 수신이 제일 힘들고 그다음이 가정을 건사하는 일이요, 또 치국은 이보다 덜 힘들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정치 구단’이라던 김영삼·김대중씨도 자식들 때문에 국민에게 사과하지 않던가 말이다.

그러니까 누가 공자에게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시냐?”고 묻자 그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것이 곧 정치니 어찌 벼슬하는 것만이 정치겠소!”라고 답했던 것이다.(<논어>) 좋은 정치의 근본은 가정의 화목에서 비롯된다는 말이니, 대통령 노릇은 집안 구성원들을 만족시키는 도리를 정치에 적용하는 데 불과하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겠다.

학교를 놓고 봐도 그렇다.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은 교사다. 곧 교사는 학교의 본바탕이다. 교사는 교장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며 또 교장을 ‘위하여’ 존재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외려 교장은 근본인 교사를 보호하고 돕는 외피에 해당한다. 빵으로 치면 교사는 속살이요 교장은 껍질이다.

물론 외피는 필요하다. 껍질이 없으면 속살은 오래 보존되지 못하고 쉬 상해 버린다. 하나 껍질을 두고 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도리어 빵 먹을 땐 껍질을 벗겨내고 속살만 먹는 수가 많다. 만일 어느 교장이 학교를 상명하복의 조직체로 만들고 교사를 제 명령을 집행하는 수하로 부린다면 학교의 본말을 전도시키는 망동이다. 비유컨대 빵의 속살을 태워서 몽땅 껍질로 만드는 격이다. 이미 이건 빵이 아니다. “앙꼬 없는 찐빵은 빵이 아니다”라는 속담도 떠오르는 대목이다.

법원에도 똑같은 비유의 적용이 가능하다. 법관은 법원의 속살이요 법원장은 외피다. 특히 법원은 법관 개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기관과도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법관의 독립성은 중요하다. 이에 헌법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103조) 이 규정이 마비되면 공화정은 죽는다.

법원이라는 빵의 속살은 사회질서를 담보하는 보루로서 스스로도 자율적이어야 하지만, 국민들도 그 독립성을 보호해야 한다. 이 원칙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민주공화국의 정당성은 법률에 의해 보장받고 또 법률은 법관에 의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 대법관의 법원장 시절 처신이 큰 문제가 되어 온 나라를 흔들고 있다. 그의 처신을 두고 사법행정권의 행사라는 견해도 있다. 하나 ‘친전’이니 ‘대외비’라는 언어를 사용한 그의 ‘이메일 재판 관여’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바탕으로 사회질서를 수호할 법원의 본질을 훼손한 행위라 생각한다.


교장이 학교의 본질인 교사를 수하로 부리면 교육이 황폐해지듯, 자율성을 생명으로 하는 법관이 관료화되면 법원은 통치의 도구가 되기 십상이다. 헌법 103조는 이 점을 염려하고 있다. 신영철 대법관은 빵을 태운 것이다. 태운 빵은 먹을 수 없고, 빵을 태운 요리사는 이미 요리사가 아니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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