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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3 19:14 수정 : 2009.03.23 20:31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세상읽기

지난 1월, 일본 후생노동성의 한 고위 관료가 근로자파견법이 완화되는 것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공개 사과함으로써 일본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일본 후생노동성 히로시마 노동국의 오치아이 준이치 국장은 2003년 근로자파견법이 개정되면서 제조업에도 근로자 파견이 가능하게 된 데 대해 “나는 원래 문제가 있는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당시 시장원리주의가 전면적으로 나타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를 막지 못했다. 노동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누군가가 사직을 해서라도 (법 개정을) 막지 못했던 데 대해 사과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파견근로자도 같은 직장의 동료로 인식해야 한다. 고용계약을 중도해제해서는 안 된다. (파견근로 계약을 중도해제하지 말도록) 소리 높여 지도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근로자파견법 개정 당시 후생노동성의 임금시간과장을 맡고 있었던 오치아이 국장의 이런 공개사과는 곧 지난 10년간에 걸쳐 진행되어 왔던 일본의 시장원리주의적 노동정책에 대한 자기반성의 표현이라 하겠다. 사실 일본은 1990년대 중반부터 구조개혁의 명분 아래 민영화·규제완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도입하였다. 특히 2001년 고이즈미 정권이 출범하면서 시장원리주의 정책의 도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일환으로 근로기준법·근로자파견법의 개정 등 노동시장에 대한 규제완화 조처가 잇따라 도입되었다.

그러나 규제완화의 결과는 노동시장의 질서 붕괴로 나타났다. 비정규직 규제완화로 비정규직의 수가 급속하게 늘어났고 노동시장의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빈곤·가정파괴·노숙·이혼·질병·자살·범죄의 증가 등 각종 사회적 문제가 빈발하였다. 특히 지난해 6월 도쿄 시내의 아키하바라 거리에서 한 청년 파견근로자가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칼을 마구 휘둘러 17명을 살상한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사건’은 일본 사회 전체를 경악에 빠뜨렸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비정규직을 전전하면서 쌓인 미래에 대한 절망과 사회에 대한 불만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론은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를 다시 강화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고 일본 정부 여당도 이러한 여론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어 일용파견근로 금지 등 노동시장에 대한 ‘재규제’ 법안을 준비중이다. 오치아이 국장의 발언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이러한 경험은 한국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정부 여당은 현재 비정규직 근로자의 최대 고용계약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비정규직법 개정안(실은 개악안)을 준비중이다. 노동부는 오는 7월에 고용기간이 만료되는 비정규직의 실업이 100만명에 육박할 것이라는 이른바 ‘비정규직 100만 실업대란설’을 비정규직법 개정의 근거로 들고 있지만, 여러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 이러한 노동부의 주장은 과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 여당은 반대여론에 대해 눈과 귀를 막은 채 비정규직법 개악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부 여당의 비정규직법 개악 움직임의 진짜 목표가 임금이 싸고 해고가 쉬운 비정규직 근로자를 기업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자는 데 있음을 짐작하게 하는 처사다. 이처럼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가 완화될 경우 우리 사회에 어떠한 충격을 주게 될지는 일본의 사례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노동시장의 질서가 무너지고 각종 사회문제가 빈발하게 될 경우, 몇 년 뒤 한국에서도 어떤 고위 관료가 “당시 자리를 걸고서라도 비정규직법 개악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한다”는 기자회견을 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윤진호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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