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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31 22:00 수정 : 2009.03.31 22:00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세상읽기

최근의 몇몇 사건은 우리 사회의 내면을 보여 주는 뼈아픈 자화상이었다. 장자연씨의 비극은 이 어려운 시대에 인간으로서의 최소 자존을 지키며 먹고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깨닫게 한다. 어느 정도 이름이 난 장씨가 당했을, 자살에 이른 모욕을 떠올리면 다른 많은 무명의 유흥업소 여성들이 삶을 위해 참고 견디는 수모와 고통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남긴 문건은 생명을 건 사회 고발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무명의 장자연씨들이 매일 밤 같거나 더 심한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관련된 회사 인사조차 책임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데에서, 타인의 생명을 앗아 가고도 우리가 더 누리려는 가치는 과연 무엇인지 묻게 된다. 장씨 사건이 결코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타락한 인간관계와 왜곡된 거래 사슬의 반영인 것은 그것이 돈·권력·향락을 매개 삼아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우리네 집단의식과 관행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결국 장씨 자살은 사회적 타살인 것이다. 이렇듯 (그녀를 자살로 몰아간) 개인 문제는 곧 사회 문제의 표현이며, (돈과 향락의 거래 사슬을 포함한) 전체 사회 문제는 개인 문제로 귀결된다. 사람이 결코 ‘상납’과 ‘접대’의 수단이요 도구로 사용될 수는 없다.

일주일여 전에는 같은 날 경기와 부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안아무개군과 중학교 3학년 이아무개군이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죽음을 맞이한 그들과, 자식의 자살이라는 엄청난 상황에 직면한 부모의 심정을 떠올리면 한 사람의 교사이자 부모로서 우리 시대에 교육은 도대체 무엇이며, 자식을 기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를 뼈아프게 묻게 된다.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가 다음날 0시30분에 귀가하는, 좋은 성적을 가진 안군은 자주 ‘공부하는 게 힘들다, 죽고 싶다’고 했고, 이군은 ‘중3인데 50년은 더 산 것 같다. 사는 게 고통’이라고 썼다. 계속되는 청소년 자살 행렬은, 결코 한두 학생의 충동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른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한다. 교육은 바로 다음 세대의 좋은, 바른 삶·생명을 위한 양육 과정이 아닌가?

장자연씨 사건이 자기 존엄을 지키려는 최후 저항의 표출이라면 박연차씨 사건은 거꾸로 더 많은 돈과 더 많은 권력을 향한 상층 그룹의 무한 질주와 부패 거래 구조를 폭로해 준다. 이 사건은 하루하루를 먹고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삶들의 저편에서 진행되는 추악한 사회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그러나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는 그것을 훨씬 넘는다. 이제 한국 사회는 ‘70~80’, ‘민주화’, ‘386’ 세대가 주도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타락하고 왜곡된 ‘청렴’·‘정의’·‘도덕’·‘투명’·‘공적 헌신’과 같은 보편적 말과 가치를 다시 바로 세워야 하는 지난한 임무를 부여받게 되었다. 우리는 말과 가치의 이 타락과 왜곡을 미구에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박연차씨 사건이 주는 가장 큰 의미와 충격은 이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한 사람의 생명은 온 천하보다 귀하다. 동시에 생명은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통해서만 존재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생명 유지·자존·품격의 상승은 타인의 생명·자존·품격의 유지와 상승에 얼마나 기여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반대가 결코 아니라. 장자연씨·박연차씨 사건의 연루자를 포함해 그들은, 우리는,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장자연씨들, 안군·이군들을 갖고 나서야 다른 사람을 자신의 욕망과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목적적 존재로 대우하는, 즉 다른 생명에 대해 더 긍휼해지고, 다른 죽음에 대해 더 애통해하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이 아침에 자성해 본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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