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4.02 23:06
수정 : 2009.04.02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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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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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며칠 전 한일전 야구를 보는데 오래된 의문 한 가지가 떠올라 경기 관람에 방해를 받곤 했다. 모국어를 다루는 직업을 가져서인지 낱말 하나를 사용하는 데도 이리저리 따져보며 과연 그 단어가 그곳에 적확하게 들어맞는지를 염두에 두곤 한다. 그런 버릇 때문인지 들을 때마다 귀에 걸리고, 마음으로 영 소화가 되지 않는 용어가 하나 있었다. ‘일제 강점기’가 그것이다.
내가 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그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는 ‘일제 식민지’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우리는 그 시기를 일제 강점기라고 일컫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란 아마도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점령한 시기’라는 뜻일 텐데, 그 문장의 주어는 일본이다. 그러니까 나의 의문은 우리나라 역사를 기술하면서 상대국이 주체인 용어를 사용하는 게 정치적으로 옳은가 하는 것이었다. 그 용어를 다른 각도로 풀이해서,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점령된 시기’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 문장 속에서 우리나라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수동적인 위치에 방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일제 식민지라는 용어를 일제 강점기로 바꾸었을까. 혹시 일제 식민지라는 용어에 불행과 굴욕, 수치심이 많이 묻어나니까 다소 온건한 어휘로 교체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그랬다면 그것은 역사적 진실을 외면하고, 불행한 역사의 책임을 떠안지 않으려는 비겁한 태도 아닐까. 그런 태도는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무능력의 소치 아닐까 등등,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용어 하나를 가지고 시시콜콜 따지는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지금도 우리가 식민지 시대를 대하는 태도는 저 용어를 만든 마음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지난 일은 그냥 덮어두자, 자꾸 들쑤셔봐야 나오는 건 뱀뿐이다.’ 그것은 역사적 진실을 회피하는 태도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친일파를 색출해서 정의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그것은 나라 잃은 분노를 진정한 대상에게 쏟지 못한 채 만만한 상대에게 투사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던 독립 운동가들이 있었다.’ 그것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나르시시즘일 것이다. 물론 그런 태도들도 과거사를 애도하는 한 방법이기는 하다.
하지만 불행한 역사를 진정으로 애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명백한 진실을 당당히 인정하는 태도가 먼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 사실을 인정한 후, 불행했던 시대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여러 사람이, 다양한 방식으로 충분히 이야기하는 과정이 따라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한 시기에 우리가 국력이 약했고, 준비성도 없었고, 정치적으로 어리석었다는 사실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에서 교훈과 지혜를 얻고, 같은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는 방법일 것이다.
지금도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은 대체로 신문물, 자유연애, 낭만적 정서 등을 그린다. 그것 역시 문제의 핵심을 회피하는 태도로 보인다.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이야기하는 작품으로는 소설 <토지>나 뮤지컬 <명성황후>, 그리고 정신대 할머니들 이야기 정도를 만난 것 같다. <토지>나 <명성황후>가 대중들에게 크게 향유되는 배경에는 역사적 불행을 애도하고 싶어하는 동시대인의 집단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짐작된다. 한국전쟁을 다룬 영화 중, 이데올로기를 배제하고 개인의 불행과 휴머니즘에 초점을 맞춘 <공동경비구역 JSA>나 <태극기 휘날리며>가 크게 히트한 배경도 그와 같을 것이다.
김형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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