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4.14 22:20 수정 : 2009.04.14 23:42

김별아 소설가

세상읽기

.



안녕, 친구! 잘 지내는가? 나는 얼마 전 이사를 했다네. 거처를 옮기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산책로를 물색하는 것이지. 집 앞을 흐르는 작은 개천은 얼마간 뻗어가 탄천과 만나네. 그 천변에는 잘 조성해놓은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있지. 등교를 하는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서 한 시간가량 걷곤 해. 겨드랑이에 살짝 땀이 차고 호흡이 더워질 때까지 홀로 씨근대며 걷노라면, 외롭기에 자유로운 이번 생애를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지.

자네의 급한 연락을 받은 것은 봄이 아직 멀게만 느껴지던 지난 2월 중순이었지. 메일에 첨부해 보내준 파일에는 자네가 소속된 국가인권위원회에 대한 행정안전부의 조직개편 검토안과 인권위의 현재 상황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지. 읽노라니 화가 나기보다 기가 막혔네. 인권위 축소 논란은 이념 따윈 고사하고 정치논리로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지. 그건 다만 정권과 체제를 넘어서 인간의 최고이자 최후의 가치인 인권에 대한 무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소극일 뿐이었어. 메일로 소식지를 받아 보는 시민단체 중에 인권위 개편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던 곳이 장애인 단체였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지. 그들의 애끓는 하소연과 절절한 분노를 보며 새삼 깨닫게 되더군. 자네들은 바로 그들의 편이었네. 몸이든 마음이든 ‘장애’의 낙인이 찍힌 채 세상의 차별과 억압에 신음하는 모든 힘없고 약한 이들의 마지막 보루였네.

누군가 그대들을 ‘남한산성’이라고 빗대어 부른다고 했던가? 자네는 그에 대해 “행주산성이 되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지”라고 담담하게 대답했지. 고작해야 글줄 나부랭이로밖에 도울 수 없는 내게 “작가 친구를 둔 게 지금처럼 행복할 수가 없네”라고 말해 주었을 때는 너무 부끄러워 할 말이 없었어. 고마워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라 나라네. 이토록 도저한 환난과 환멸의 시대에 자네같이 꿋꿋하고 신실한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물론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가는 스스로 잘 알고 있지만, 어쨌든 적어도 친구에게 부끄러운 일은 하지 말고 살아야지. 스무 살의 그때처럼 불꽃의 삶을 꿈꾸기엔 현실이 너무 초라해도, 최소한 우리가 맞서 싸우던 그 괴물을 닮아가진 말아야지.

가열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3월24일 행정안전부의 국가인권위원회 21% 축소 최종안이 법제처 심사를 통과했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상심한 자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라 하루종일 우울했다네. 그런데 그대들, 정말 멋진 친구들이더군! 그로부터 며칠 뒤 연거푸 날아온 인권위의 소식 메일에는 ‘인권사랑 이벤트’와 ‘의약품 특허발명 강제실시 토론회’ 개최 소식이 경쾌한 일러스트와 함께 실려 있었지. 그래서 나는 자네가 다른 부서로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도 놀라거나 걱정하지 않았어.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지레 포기하기 전에는. 자네의 말대로 인권상담센터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노라면 더 팽팽한 의지와 활력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봄! ‘보다’(見)에 그 어원이 있다는 계절이 천지간에 오색 빛깔로 한창이네. 며느리에게 양보한다는 따가운 봄볕에 노화의 주적인 자외선이 걱정되지만 모자 따위는 벗어젖히네. 시야를 넓혀 더 멀리 보아야 해. 사람의 일에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는 오직 자연이 스승이자 벗이지. 스스로 그러한 자연은 조급해하지도 주저하지도 희망을 잃었노라고 코를 빠뜨리지도 않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노라면 겨울 추위를 이겨낸 뭇 생명들이 살아라, 살아 있으라, 지상명령을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지 않은가? 친구, 부디 잘 견디세.

김별아 소설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