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9.04.23 21:26 수정 : 2009.04.23 21:26

김형경 소설가

세상읽기

외국 정신분석 책에서 읽은 사례이다.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이 성공한 중년의 변호사 남성이 정신과 의사를 찾아왔다. 그는 아내와의 갈등, 성 불능, 자기파괴 욕망과 자살 기도 등의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를 분석해 들어갔을 때 그는 한 번도 자기 자신으로 살았던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그가 처음 사귄 친구를 그의 어머니는 만나지 못하게 했다. 흑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중학교에 들어가 그림에 흥미를 보였을 때 어머니는 또 반대했다. 불안정한 예술가의 삶을 살게 할 수는 없다는 게 이유였다. 고등학교 시절 농구에 몰두했을 때는 법대에 진학하여 가업을 잇도록 입시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을 주문했다. 대학에 진학하여 여자친구를 사귀었을 때는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요구했다. 조건으로는 유럽 여행을 제시했고 그는 여자친구와 여행을 맞바꿨다. 결국 그는 변호사가 되었고, 좋은 조건의 여성과 결혼해 누가 보기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렇지만 내면은 공허하기만 할 뿐, 행복감이나 성취감을 느낄 수 없었다.

그가 삶의 역사에서 잃은 것들은 비단 친구나 그림이 아니었다. 친구를 잃었다는 것은 친구와 동일시하고 애착을 나누며 정신적·정서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잃은 것이었다. 미술을 그만둔 것은 좋아하는 일에 도전하여 성취감을 맛보고 작은 실패를 이겨내는 용기를 얻을 기회를 놓친 것이었다. 농구를 못한 것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을 배울 기회를 잃은 것이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것은 사랑을 통해 내적으로 새롭게 태어나면서 충만감을 누릴 기회를 잃은 것이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만들어갈 기회를 거듭 잃었고, 생을 자율적으로 운용할 능력을 배우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는 상실과 박탈의 문제, 돌보지 못한 슬픔과 분노만 쌓여 갔다. 이것은 ‘자기 정체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정신분석학자 에릭 에릭슨이 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사례다.

저토록 심각하지는 않지만 일상에서 자주 저 남성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난다. 부모님, 선생님, 부장님 말씀을 잘 듣는 훌륭한 사람으로 살다가 서른 살이 넘어서야 문득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삼십대 여성이 있다. 리포트 쓰기 과제 앞에서 “교수님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대학원생도 있다. “친구들이 제게 글을 써보라고 하는데,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묻는 중년여성도 있다. 심리 에세이를 읽고 내게 메일을 보내거나 사석에서 질문하는 이들의 공통적 문제 역시 자기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신분석학에서 학파마다 용어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중요시하는 개념이 있다.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 독립하여 자기 자신이 되는 것,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으로 서는 것이다. 대상관계 학파에서는 분리 개별화, 융 학파에서는 개성화 단계, 자크 라캉은 주체화,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은 자기정체성이라는 용어로 말하는데 그것이 모두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과 관련된 개념이다.

자녀의 삶을 통제·간섭하려는 부모의 불안감을 먼저 보는 것, 자녀의 자율성을 넓게 보장하고 시행착오를 통해 성장할 기회를 주는 것, 그런 문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성공담을 말하는 이들의 삶의 과정에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낸 일화가 빠짐없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사업가나 예술가, 성직자조차도.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세상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