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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28 22:39 수정 : 2009.04.28 22:39

송상용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회원

세상읽기

25년 전 내가 처음 왔을 때 피사의 사탑은 앞에 노점이 몇 군데 있는 한적한 곳이었다. 이제 사탑 옆에는 두 박물관이 문을 열었고 2차대전 때 폭격에 탄 성원(캄포산토, 묘지)이 복원되어 ‘기적의 광장’은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1173년 착공한 8층 탑은 3층이 올라갈 때부터 기울기 시작했다. 땅속에 돌을 박아 탑을 바로 세우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1350년 준공했을 때는 반대로 기운 상태였고 20세기 말에는 기울기가 4.5m에 이르렀다. 1990년부터 출입을 막고 10년 넘게 보강공사를 했다. 탑을 1838년 위치로 돌려놓는 데 성공해 2001년부터 다시 일반에 공개했다. 보수는 내년에 끝날 예정이다. 공사를 지휘한 런던대 벌런드 교수는 탑이 300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갈릴레오는 피사에서 태어나 피사대학을 다녔고 모교의 교수가 된 뒤 3년 만에 파도바대학으로 옮겨갔다. 주제페 주스티 길 24·26에 있는, 그가 태어난 ‘암만나티 (갈릴레오의 어머니)의 집’에는 지금은 부동산회사가 자리하고 있다. 탑 가까운 곳의 ‘갈릴레오의 집’은 도서관 겸 연구소다. 갈릴레오는 종교재판을 받은 뒤 1634년부터 8년 동안 피렌체 남쪽 교외 아르체트리의, 미리 사 둔 별장 ‘보석’에서 말년을 보냈다.

갈릴레오는 결혼한 일이 없지만 가정부 마리나 감바와의 사이에 두 딸과 한 아들을 두었다. 사생아라 결혼할 수 없는 딸들을 그는 아르체트리의 산 마테오 수도원에 보냈다. 작은딸은 평생 병치레를 했으나 큰딸 비르지니아는 16살에 베일을 쓰고 마리아 첼레스테 수녀가 되었다. 마리아는 34살에 죽을 때까지 11년 동안 아버지와 서신으로 접촉했다. 갈릴레오의 편지는 찾을 수 없어도 마리아가 보낸 124통의 편지가 남아 있다. 이 편지들은 피렌체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고 갈릴레오 전집에 수록되었으나 사가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뉴욕 타임스> 과학기자를 지낸 소벨의 베스트셀러 논픽션 <갈릴레오의 딸>(1999)이 나오면서 거장의 인간적인 면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딸의 편지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이 물씬 배어 있다. 애틋한 사연도 많다. 수도원의 추운 방과 거친 음식을 호소하면서 남는 이불을 빌려 달라고 한다. 딸은 케이크, 냅킨, 약을 만들어 보내고 아버지는 손수 요리한 시금치를 보내 준다. 수녀가 될 때 택한 이름 첼레스테(하늘)에서 이미 아버지를 배려했거니와 마리아는 새로 나온 책도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아버지는 수도원의 창틀을 손봐 주고 시계를 고쳐 준다. 아르체트리의 별장은 산 마테오 수도원과 붙어 있다. 서재에서 종소리를 들으며 수도원을 바라보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별장으로 돌아오기 넉 달 전 마리아는 이질에 걸려 죽는다. 아버지의 엄청난 슬픔과 좌절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

8년 뒤 죽은 갈릴레오는 성당 종탑 밑에 묻혔다가 95년이 지난 1737년에야 산타 크로체 성당에 이장되었다. 딸과 합장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런 기록은 없다. 무덤을 열어 이를 확인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지난해 봄 논쟁이 일어났다. 피렌체 과학사박물관장 갈루치는 디엔에이 검사로 합장 여부를 가려내고 갈릴레오의 실명 원인도 찾자는 학자들의 선봉장이다. 반면 산타 크로체 성당 주임신부 디 마르칸토니오는 그건 ‘사육제’(카니발)라고 단호히 반대한다.

갈릴레오의 망원경 관측 400돌 기념행사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풍성하다. 5월 말 피렌체에서 열리는 국제학회 ‘갈릴레오 사건: 역사·철학·신학적 다시 읽기’가 기대된다. 피날레는 아르체트리의 별장에서 있다는데 못 보고 떠난다.

피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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