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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5.05 21:42 수정 : 2009.05.05 21:42

김별아 소설가

세상읽기

일년 전 나는 캐나다 서부의 광역시 밴쿠버의 작은 위성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다. 긴긴 우기가 끝나 사방에 별꽃 같은 수선화가 지천인데, 지난겨울의 냉기는 가시지 않은 듯 문득문득 뼈마디가 저렸다. 어쩌면 이럴 수가 있는가? 어떻게 싸워 얻어낸 것들인데 …… 분노와 배신감과 허탈감이 만리타국의 내게까지 모질게 엄습했다.

기실 사기는 공모의 범죄다. 모든 범죄의 근원이 멀고 지루한 정도(正道)를 가기보다는 쉽고 편하고 빠르게 가기를 바라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기 마련이지만, 사기는 사기꾼의 사악한 의지에 피해자의 탐욕이 응대하여 빚어지는 일이다. 보통의 노력이나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더 많이 받게 해주겠다, 남들이 모르는 샛길이나 지름길을 통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게 해주겠다! 노력보다는 요령을, 투자가 아닌 투기를, 정공법이 아닌 편법을 꿈꾸는 사람들은 사기꾼의 반지르르한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률 몇 퍼센트, 국민소득 얼마,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강국을 만들겠노라는 휘황한 말 놀음에 홀딱 속은 국민들은 도덕성이고 역사관이고 깡그리 모르쇠하며 그 사기극에 기꺼이 동참했다. 주어가 없으니 상관없었다. 어차피 털어서 먼지 나지 않는 놈 없는데 도긴개긴이라 했다. 바야흐로 명분보다 실용의 시대가 아닌가? 경제를 살리고 부자를 만들어준다는데, 사기꾼이면 어떻고 도둑놈이면 또 어떤가?!

태평양을 건너 날아온 소식에 나는 다만 황망하고 무력했다. 누군가와 대화조차 하고 싶지 않았기에 한달가량 한국에서 걸려오는 어떤 전화도 받지 않았다. ‘어륀지’며 ‘후렌들뤼’며 끊임없는 ‘오해’의 소극들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뜬금없이 이민 절차를 상담하는 컨설팅회사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아무래도 싸울 기력을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두려워하기엔 너무 우스꽝스럽고, 진지하게 접근하기에는 너무 혐오스러웠기 때문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라는 말이 이토록 생생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꼭 이맘때쯤이었다. 사위어가는 잉걸불에서 튀어 오른 불티처럼 촛불들이 하나둘 광장으로 모여든 것은. 출발은 어쩌면 우연이었다. 사실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 높은 30개월 이상 미국산 쇠고기보다 대운하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하던 나로서는 조금 엉뚱하게 느껴진 시작이기도 했다. 게다가 지도부가 따로 없는 중고생과 유모차를 끈 어머니들과 각종 인터넷 동호회의 깃발을 앞세운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는 비장한 결의로 나서야 했던 살벌한 시위현장을 기억하는 내게 신선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물론 나는 싸움만이 아니라 패배도 기억하고 있기에 순진한 촛불들이 당장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마르크스의 일견식은 여전히 놀랍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들지만 역사는 그들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해 봄의 광장은 아름답고 자유로웠다. 비록 몸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방에 있었지만 마음만은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노래했다. 그들을 사랑하는 동안, 들끓던 미움이 사라졌다. 그들이 있기에 절망보다 큰 희망을 품었다. 그리하여 밤새워 인터넷으로 생중계되는 촛불집회를 시청하며 돌아와야겠구나, 돌아올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로부터 벌써 일년이 지났다. 때때로 그 모두가 꿈이었나 싶을 만큼 깜깜나라만 같다. 하지만 인도의 속담에는 천년의 어둠도 촛불 하나로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단 하나면 충분하다. 벌써 일년이 아니라, 이제 겨우 일년인 것이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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