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12 23:29
수정 : 2009.05.12 23:29
|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
세상읽기
신록이 짙어지는 5월은 자녀·부모·배우자·스승 등 소중한 일차관계를 다시 생각게 하는 ‘가정의 달’이다. 이들 일차관계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고 기쁨을 같이 나누며 희망을 북돋워줄 첫 존재인 동시에, 먹고사는 것과 성장과 인간관계가 결코 녹록지 않음을 깨닫게 하는 최초 단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직분은, 다른 삶에 결정적 영향을 주는 첫 요소인 부모와 교사가 아닐까 싶다. 자녀와 학생과 세상을 향해 바른 삶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받는 자의 위치에서 볼 때 양육은 결코 연습이 없다.
한 사람의 삶에서 부모와 교사의 중요성이 너무도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대로 부모와 스승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만큼 가정과 사회의 위기를 말한다. 우린 부모의 고단한 삶을 떠올리며 눈물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들이 죽어 무덤에 있건 육신을 가누기 힘든 고통 속에 있건, 또 사업과 경쟁에서의 패배로 위축되어 있건 ‘엄마!’ ‘아버지!’를 가슴으로 또는 소리내어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고난을 이겨낼 가장 큰 동력을 얻는다. 우리의 어떤 시련도 우리를 기를 때의 부모의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되기 때문이다.
이제 부모가 되어 자신의 욕망과 이기심을 아이에게 투사하려는 나와 우리 세대를 돌아보며, 입시와 학원에 대해 아무 지식이 없었더라도 오직 사랑과 헌신으로 자식들을 길렀던, 그리하여 참삶과 참교육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었던 앞 세대의 위대한 희생을 다시 생각해 본다. 자신들은 산업화를 이루고 그 자녀들은 민주화를 이루었음을 기억할 때, 물욕과 경쟁심으로 가득한 우리 세대가 양육하는 자녀와 학생들이 자기 삶을, 그리고 이 공동체와 세계를 어떻게 영위해갈 것인지를 생각하면, ‘70-80’, ‘386세대’의 역사적 실패는 지금보다 미래에 더 클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반성을 해본다. 한 사람과 한 사회에서 교육처럼 세대를 넘어 전수되는 인간문제나 사회문제도 드물기 때문이다.
직분과 소명으로서의 교사는 거의 없고, 직업과 직책으로서의 교사는 넘쳐나는 오늘, 며칠 전 서거한 장영희 교수는 동료로서 교사의 참역할을 돌아보게 하는 존재였다. 그의 글은 곧 그의 삶이었고, 그의 삶은 곧 그의 글이었다. 그의 글·삶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음을 우린 잘 안다.
헬렌 켈러의 고백은 삶에서 바른 교사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웅변해준다. “일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날이 있다면 바로 이날, 내가 앤 맨스필드 설리번 선생님을 만난 날이다.” 설리번 선생과의 만남은 감당할 수 없는 다중장애를 지닌 한 삶과, 그로부터 감동받은 삶들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과 그때 받은 사랑은 장발장을 뒤집는 영혼혁명을 가져왔고, 그 혁명은 그가 만나는 사람들을, 그리고 끝내는 평생 그를 잡으러 다닌 사람마저 바꿔놓았다. 책을 통한 전태일과의 만남은 많은 젊은이들을 인간적 사회에 대한 고뇌로 안내하였다는 점에서 그 역시 참교사였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뒤 예수의 가장 위대한 제자가 되었고, 그 후 그를 빼고는 기독교를 말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사랑으로서의 교육, 교육으로서의 만남은 사람을, 영혼을 변화시키고, 그것은 다시 사회를 역사를 바꾼다. 한 부모이자 교사로서 나의 양육, 오늘의 교육을 돌아보며 젊은 영혼들을 변화시킬 한 사람의 설리번, 한 알의 밀알로서의 바른 교사가 없어 이 땅의 교육혁명, 영혼혁명이 없는 것은 아닌지 이 아침 무거운 자성의 걸음으로 교정을 들어선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