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5.15 21:47
수정 : 2009.05.15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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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서울대 교수·면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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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한강 다리를 지나 시청을 향해 가다 보면 아무리 전경 버스가 가로막고 있어도 눈에 뜨이는 곳이 있다. 용산 재개발 지역 철거민 진압 과정에서 70대 노인을 포함하여 중년을 넘긴 일반 시민들과 경찰마저 희생된 장소다. 어떻게 이런 일이 21세기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날 수 있는가와는 별도로, 경찰은 도심테러라는 표현으로 사망자들을 테러범으로 표현했고, 사회 일부에서는 이른바 좌빨의 행태라고까지 표현했다. 모두 미국의 강력한 공권력 집행 사례를 들어가면서 용산 사태는 사회질서를 위한 정당한 공권력 행사였다고 한다.
하지만 누구도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을 부정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공권력의 집행이 아니라 공권력 집행의 과정이다. 미국에서 흉악범을 쫓는 경찰이라도 범인의 생명을 위험하게 하는 과도한 추격은 엄중하게 금지되어 있다. 또 재판에서 살인범을 증명할 결정적 증거라도 불법적인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은 법정에서 채택되지도 않는다. 과정이 투명하기에 미국의 공권력 집행과 사법적 판결은 일반인의 지지를 얻는다. 사회의 민주주의는 결과이기 이전에 과정이다.
작년 촛불사태가 일어난 근본 이유도 적절한 과정을 무시한 졸속 협상이었다. 정부의 자기합리화를 위해 남발했던 정부 공무원들의 이야기는 1년이 지난 지금 어느 것 하나 이루어진 것이 없다. 더욱이 정부는 공공연하게 과학을 왜곡하고 국가의 기본 방역 개념마저 흔들어 버렸음에도 국제사면위원회의 지적처럼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웠다. 이렇게 힘으로 국민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음을 경험한 정부는 무수한 눈길도 무시한 채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과도한 공권력으로 시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동안 공공연한 비밀로 진행되던 폭력적 철거민 탄압을 백주대로에서 거리낌없이 진행하고 불타 죽은 일반 시민을 좌파 운동권으로 포장해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한 것은 촛불에 대한 정부 수법과 너무도 유사하다. 우리 사회의 이 뻔뻔스러움은 어디서 온 것일까.
어느 사회나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것이 있고, 이런 기본이 무너지는 사회에서 최후의 보루는 언론과 사법권이다. 검찰은 정부에 비판적인 방송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보 제공자의 신원이 노출되어 기본적인 언론 기능의 저해를 가져올 수 있는 방송 원부를 증거로 제출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다수 시민이 사망한 용산 사태에 관련된 수사 자료는 법원에 제출하지 않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어디 검찰뿐인가. 재판부의 정체성과 관련한 기본 사항마저 지키지 않은 판사가 말단 판사도 아닌 대법원의 판사다. 심지어 보수 논객을 자처하는 한 교수는 미국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좌파들도 자녀는 미국으로 유학 보낸다며 위선이라고 비난하였다. 이 논리는 일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전체 집단을 미워해야 한다는 연좌제식의 흑백논리이자 범주화와 일반화의 오류를 담고 있는 모골이 송연한 시각이다.
이처럼 다양성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는 기득권의 논리에 둘러싸인 국가권력의 모습과 이를 견제할 사회기능의 마비를 보면서 우리 사회가 광주항쟁 이전 시대로 퇴행한 모습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촛불에서 배운 현 정권의 자만심과 뻔뻔스러움은 용산 참사로 이어졌지만, 봄날의 새싹은 어떻게 짓밟아도 반드시 움을 틔우고 생명을 노래한다. 어떻게 보면 촛불의 흐름은 용산으로 이어졌고 비록 대도시 한복판에서 나이 든 일반 시민이 무참히 불타 죽었지만 이것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훗날 현 정권에 대한 역사적 심판에 가장 치명적인 사안으로 기록될 것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면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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