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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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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난 19일, 정조의 어찰들이 드디어 전모를 드러냈다. 지난 2월에 그 일부가 공개됨으로써 학계는 물론이고 전국민의 관심을 끌었던, 심환지와 정조 사이에 오간 비밀 편지들이다. 적대적이건 우호적이건 가리지 않고 배후에서 정파들을 조종함으로써 정국을 이끌려는 ‘독재자’ 정조의 면모가 잘 드러났다. 정조의 문화정책을 ‘문체반정’이라고 하는데, 문체 곧 말과 글의 스타일까지 군주가 간여하여 이념에 충실하도록 이끌겠다는 뜻이다. 또 역대로 그만큼 유교 경전에 밝은 임금도 없었다. 정조의 저술은 따로 <홍재전서>라는 문집으로 전하는데 여기에는 유교 경학에 관련된 내용이 많다. 신하들을 쩔쩔매게 할 정도로 박식한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그는 군사(君師), 곧 임금이면서 스승으로 자처하였다. 한데 이번 어찰이 공개되면서 반듯한 유교 정치가의 모습 뒤에 놀랍게도 반유교적 정치가, 또는 권모술수를 서슴지 않았던 독재자의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유교가 제시하는 정치이념은 성학(聖學)이라는 말로 압축된다. 우리는 조선시대 대표적 유학자로 퇴계와 율곡을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둘은 각각 임금에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제시하고 있는데, 퇴계의 것이 ‘성학십도’요 율곡의 것은 ‘성학집요’다. 우리는 두 대표적 유학자의 정치철학이 똑같이 ‘성학’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학의 ‘성’은 성왕, 곧 요순임금을 뜻한다. 순은 평민 출신으로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성왕의 대명사다. 한데 순이 왕이 된 까닭을 “자신을 버리고 남의 의견을 들어 쓰기를 즐긴 점에 있다”(舍己從人, 樂取於人)라고 경전은 요약한다. 성(聖)의 부수가 귀를 뜻하는 이(耳) 자인 데서도 ‘듣기’에 방점이 찍히는 글자임이 방증된다. 한편 학(學)은 배운다는 뜻이다. 곧 성학에는 상대방(신하)으로부터 배우고 또 전문가에게 일을 맡김으로써 정치를 실현한다는 뜻이 들었다. 성학의 정치란 경청과 협의, 곧 소통을 위주로 삼는 것이다. 반면 정조가 자처한 ‘군사’는 성학과 정반대 자리에 위치한다. 임금 군(君)에 입을 뜻하는 구(口) 자가 든 데서 잘 보이듯, 군이란 ‘말하는 우두머리’를 의미한다. 위에서 말하는 사람이 군주인 것이다. 또 사(師)는 스승을 뜻하니까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 곧 ‘군사’에는 임금이 홀로 아래를 향해 말하고 또 가르치는 존재라는 뜻이 가득 들었다. 군사의 정치는 지시와 독백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번 참의 편지가 갖는 정치적 의미는 겉으로는 협의와 소통을 지향한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지시와 독백으로 통치를 시도한 정조의 이중성이 드러났다는 점에 있다. 정치를 이른바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계’로 이해하는 입장에서는 이 이중성을 정치의 본질로 볼 것이다. 즉 권력을 정치로 보는 사람은 이번 어찰을 ‘정치가 정조’의 진면목이 드러난 증거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왜 영·정조대의 ‘문화 흥륭기’가 그토록 짧게 마감했던가를 의심하는 눈길에 대해 이 편지첩은 또 그 까닭을 설명해준다. 권력자의 지시와 독백, 곧 홀로 말하기가 그 멸망의 씨앗인 것이다. 한편 읽는 즉시 태워버리라는 ‘군사’ 정조의 지시를 어기고 편지들을 남긴 심환지의 뜻은 무엇이었을까. ‘성학’과 ‘군사’의 틈새, 곧 도덕정치와 권력정치 사이의 이중성을 드러내준 심환지의 속뜻 말이다. 자신이 정조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을까, 정치의 진실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정조의 실제 정치가 유교이념(성학)의 타락이었음을 예증하고 싶었던 것일까.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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