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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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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3주에 한 번씩 쓰기로 한 칼럼의 여섯 번째 게재일이 5월27일임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포스트모던에 디지털시대를 살면서도 촌스러워서 여전히 이렇다. 나이를 마흔이나 먹도록 철이 없어서 아직도 이렇다.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렀는데도, 가스불 끄는 것을 잊어 새까맣게 태워먹은 냄비가 숱한 주제에, 또다시 잊지 못해 아프다. 연고가 전혀 없는 머나먼 곳의 이야기였지만, 그래서 그때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흘려보낸 봄날이기에 더욱 안타깝고 미안하다. 얼마 전 광주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완만한 능선이 아름다운 무등산을 돌고 김삿갓이 마지막 숨을 거둔 적벽 앞에서 매운탕을 안주 삼아 잎새주를 마셨다. 그 길에 금남로와 옛 전남도청을 지났다. 검은 만장이 드리워진 도청 별관에는 ‘철거’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논란이 분분한 가운데 지역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철거 반대보다 찬성 의견이 높았다 한다. 사람의 눈만큼이나 간사한 것이 또 있을까. 최첨단 빌딩들이 으리으리하게 늘어선 도심 한복판에서 별관 건물은 초라하고 왜소하게 보이는 게 사실이다. 개발주의와 실용주의에 열광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시 미관을 해치는 흉물스러운 낡은 것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ㄱ선생은 젊은 세대가 느끼는 5·18이 우리가 느끼는 6·25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다. 1950년에서 1980년까지가 30년이고 1980년에서 2009년까지가 거의 30년 세월이니, 그 말씀이 맞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의 무관심과 무감각을 질책하거나 개탄할 방도도 딱히 없을 터이다. 하지만 자동차가 도청 앞 분수대를 끼고 돌 때, 내 귓전에는 문득 쉬지근한 듯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스쳐 갔다.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윤상원, 노동자를 위한 들불야학의 교사. 그는 1980년 5월27일 새벽 도청에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여성들과 고등학생들에게 귀가를 종용하며 그렇게 말했다. 커튼에 싸인 총상 입은 시신마저 수류탄의 폭발로 소각되어 말 그대로 한 줌의 재로 남은 윤상원 열사는 그때 서른 살이었다. 내가 처음 ‘광주학살’을 알게 된 것은 합격증을 받으러 갔던 대학 학생회관에서 열린 사진전을 보면서부터였다. 애초부터 그따위 명명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이 영광의 이름인지 치욕의 이름인지 헷갈리기만 하는 ‘386세대’의 막차를 타게 된 배경에도 어김없이 5월 광주가 있었다. 나의 젊은 날은 그것의 슬픔과 분노와 절망과 희망을 뿌리 삼아 자라났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그 거대한 뿌리에 기대어 부박한 현실을 앙버티고 있다. 인류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이미 네안데르탈인 시대부터 죽음을 슬퍼하며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한편에서는 역사를 강자들의 기록이라고 냉소하지만, 나는 역사란 기억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믿는다. 잊지 않고 마음껏 슬퍼하리라. 의롭게 죽은 자들을 기억하며 슬퍼하는 일이야말로 인류의 일원으로서의 본능이자 살아남은 자의 의무일 테니. *덧붙임: 이 글을 마친 다음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나는 그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그에 대해서는 아직 무엇도 쓸 수가 없다. 그저 슬프고 아플 뿐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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