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02 21:46
수정 : 2009.06.03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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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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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사회의 중요한 대법원 결정 가운데 존엄사에 대한 판결이 있다.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기본적으로 존엄사 인정은 ‘인간의 조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담는다. 이는 생명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생명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바라보게 하며, 삶의 질을 고려하지 않은 삶의 양만으로는 인간적이라고 할 수 없음을 뜻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뒤 마음을 비우고 당당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의 조건으로서 삶의 질을 고려하는 성숙한 사회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요즘 전임 대통령의 죽음을 자살이라며 비난하고, 또 죽었다는 것만으로 미화하지 말라는 주장이 있다. 물론 각자 시각이 다르고 또 획일적인 종교의 관점에서 보면 생명을 스스로 끊은 것에 부정적인 느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육체적 조건에 따라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 사회라면, 종종 자결이라고 하는 정신적 이유에 의한 존엄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기적이거나 아노미적인 자살도 있지만 철학적·이타적인 자살도 있다. 결코 전자를 인정할 수 없지만 후자의 예로 전쟁에서 진 패장이 조롱 속에 치욕적 삶을 사느니 자신의 존엄을 위해서, 혹은 종교 박해 때 종교적 신념을 위해서 자결한 이들도 있다. 그런데 육체로 인한 존엄사의 판단은 의학적 기준으로 어느 정도 객관성을 가질 수 있지만, 정신적 존엄사 여부는 기본적으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죽은 자가 그동안 추구하고 살아온 삶의 자세와 가치다. 이것이 비주류로서 힘없는 자를 위해 진정성을 지니고 치열한 삶을 살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존엄사로 보는 이유이다.
하지만 망자에 대한 판단이나 비난은 오직 역사적 판단에 맡겨야 한다. 그것은 죽음을 선택한 자가 정치가이건, 재벌기업가이건, 힘 있는 자들의 노리개가 아닌 인간이기를 원했던 연예인이건 모두 동일하다. 이는 죽었기 때문에 무조건 미화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 그 누구도 완전하지 못하기에 생전에 잘한 것과 잘못한 것도 있지만 죽은 자의 행위는 이제 종지부를 찍어 종료형이 되었다. 자기변명을 포함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망자에 대한 인간적 비판과 폄하는 너무 유치한 짓이다. 전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여론몰이식 마녀사냥이나 국민장에서 보여준 노란색 스카프 몰수 및 성급한 분향소 철거 등은 결코 역사적 판단의 모습이 아니다. 단지 후임자가 전임자를 욕보이는 행위이자, 민도 낮은 사회에서 저열한 인간들이 보여주는 퇴행적 정치보복 행위로 보인다.
한편, 죽은 자와는 달리 살아있는 자는 그의 행위가 현재진행형이기에 철저하게 다양한 입장에서 비판받고 검토되어야 한다. 그런 비판과 지적을 두려워하는 이는 그 사회를 이끌어갈 자격이 없다. 과연 정부는 무엇이 두려워 망자에 대한 정치적 보복 행위를 계속하는 것일까? 왜 국가기록물 건 하나로 전임 대통령을 치졸한 좀도둑으로 몰아세우고, 명박산성이나 시청광장에 벽을 쌓아야만 했을까?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는데도 그렇게 두렵다면 현 정권은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바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국민은 당신이 생각하듯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뽑은 대통령이 공감되는 일을 할 때 결코 일부 불순세력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숨어 두려워하면서 국민을 이끌려 하지 말고 당당한 모습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일반 서민을 위해 일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도 당신은 우리가 뽑은 일국의 대통령이 아닌가.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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