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6.26 19:40
수정 : 2009.06.26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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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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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브리야사바랭(1755∼1826)이라는 프랑스인은 어지간히도 음식에 밝은 미식가였나 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다오.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주겠다”라고 했다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부드러운 치즈 이야기에 이르면, 혀끝으로 여유작작 맛을 음미하던 향락주의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느긋한 구절은 독일 철학자 포이어바흐(1804∼1872)에게서는 “사람이 먹는 것이 곧 사람이다”라는 팍팍한 단문으로 변주된다. ‘먹다’라는 동사와 ‘~이다,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 현재형(ist와 ißt)의 발음이 같은 데서 비롯된 말놀이가 거대한 철학적 명제로 전환되고 있다.
이 명제를 슬쩍 뒤집어보면 어떨까. 먹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재방식을 보여준다. 먹거리에 인간 삶의 전체가 녹아 있다고 할 때, 사회가 발전할수록 ‘어떤 것을 먹는가’는 고도의 인간적 선택 행위가 된다. 헤로도토스나 사마천의 기록을 보면 고대의 어떤 사회, 어떤 극단적 상황에서는 사람이 인육을 먹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물론 용납되지 않는다. 인간의 지성과 생산력 발달이 이를 넘어선 것이다. 그 외에도 사회마다 선호하거나 기피하는 음식이 있다. 의례에 사용되는 음식에는 각별한 정성이 필요하고 세세한 준비규정이 따르는 것에서 보듯, 먹거리 속에는 인간의 정신적 지향과 상징체계가 담겨 있다.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월터 스콧의 한 소설에는 중세 영국인이 유대인을 조롱하며 돼지고기를 그의 코끝에 들이미는 장면이 나온다. 싫어하는 음식을 강요하는 것이 곧 그 인간의 존재에 대한 모욕인 것이다.
우리 사회도 절대빈곤의 단계는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음식을 단순히 굶주림을 채우는 물질로만 여기지는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음식과 인간 존재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활발한 편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작년 봄 광우병 논란과 함께 절정에 이르렀던 미국산 쇠고기 논쟁은 먹거리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성찰을 불러일으킨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 혹은 다우너 소가 광우병과 얼마나 관련되어 있는지를 떠나, 소를 오물 구덩이 위에 꼼짝 못하게 세워두는 공장식 소사육장의 실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축 사육 방식 전반의 문제에 대한 사유로 이어졌고, 먹거리를 얻기 위해 인간이 자연에 가할 수 있는 변형의 한계, 육식문화와 환경문제의 관계, 식량주권의 문제 등 많은 질문이 이어졌다. ‘존재의 연쇄 속에서 인간이 다른 생명체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이 제기된 것이다.
단순화시켜 보더라도, 당시 국민들은 “값싸다고 해서 아무 음식이나 먹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했던 것이 아닌가. 이는 “그것을 안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논의 지평을 이토록 확대해 준 미국산 쇠고기 논란을 어떤 사람들은 마녀사냥 비슷한 것으로 몰아가고 있다. 검찰은 끝끝내 피디수첩 관련자들을 감옥에 가두어야 속이 시원한 모양이다. 사적 이메일도 수사의 근거로 동원되고 있다. 정부의 협상 미숙과 관련된 구체적 내용을 잊어가던 국민들에게 새삼 그 내용을 일일이 복기해 주고 있다.
참고로, 이사하면서 안테나 설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인지 화면이 안 나오는 바람에 나는 텔레비전을 아예 시청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피디수첩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쇠고기 촛불집회 때는 구경도 가 보았고 촛불시민들과 이야기도 나누어 보았다. 나는 도대체 누구에게 사주 혹은 선동된 것일까요?
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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