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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7.07 21:10 수정 : 2009.07.07 21:10

김별아 소설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라는 말도 있지만, 가끔 작업실에서 벗어나 외출을 하면 사람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소크라테스 선생은 “관찰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하셨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재단과 편견의 잣대를 내려놓고 가만히 살펴보는 것이 필수이리라.

얼마 전에는 볼일이 있어 여의도에 갔다가 지금껏 뉴스에서나 보았던 ‘우익 시위’라는 것을 처음 구경하게 되었다. 군복을 차려입은 재향군인들이 생뚱맞게도 ‘방송의 공정성’을 요구하며 방송사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수은주가 영상 삼십도까지 올라간 날이었다. 시위대가 몰고 온 트럭에서는 군가가 우렁우렁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너무 덥고, 시끄럽고, 생뚱맞았던 탓일까? 그들의 시위는 시위라기보다 한판의 기묘한 연극 같았다.

그런데 구경꾼이 되어 주변을 시적시적 맴돌던 나는 문득 배꼽노리쯤에서 치밀어 오른 어떤 뜨거운 감정에 사로잡혔다. 분노? 분노하기에는 시위대열이 지나치게 어설프고 어수선했다. 조소? 차가운 비웃음보다는 착잡한 마음이 더 컸다. 햇살 속에 멍하니 서서 내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 한동안 고민하다가, 언젠가 이와 같은 감정을 느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푹푹 찌는 한더위 중이었다. 무슨 일로 종로에서 동대문까지 걸어가다가 비원 앞의 거리 가게에서 망설이는 기색으로 서 있는 노년의 커플을 보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노점상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거…… 얼마요?”

“닭다리 하나에 소주 한 병 해서 사천오백원이에요. 드릴까요?”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얼른 자리를 잡고 앉지 못하고 다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른 음식을 먹고 싶다거나 가게의 위생상태가 꺼림칙하다거나 하여 망설이는 태도는 아니었다. 얼마나 알뜰히 재활용했는지 시커멓게 변색된 기름에 튀겨낸 닭다리와 소주 한 병 값인 사천오백원을 걱정할 만큼 주머니 사정이 옹색한 게 분명했다. 그때도 내 가슴속에선 뭉글하고 뜨거운 기운이 치밀었다. 슬픔. 그래, 그건 다름 아닌 슬픔이었다.

시위대는 군인 아저씨도 아닌 군인 할아버지들이었다. 단단히 군모를 눌러썼지만 삐져나온 구레나룻은 성성한 백발이었다. 땡볕 아래 한참을 서 있다가 끝내 못 참고 그늘로 찾아든 할아버지들의 얼굴은 심히 염려가 될 정도로 달아오른 흙빛이었다. 정말 그들은 대전에서 부산에서 전주에서 단체 버스까지 대절해 ‘쳐들어올’ 만큼 방송의 ‘편파보도’에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저간에 알려진 대로 ‘일당’을 받고 하는 일이라면 슬프기 이를 데 없고, ‘일당’이 없다면 그 또한 서글프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그들 세대를 존경까지는 못하더라도 연민한다. 조작된 영웅이 그 공로를 독점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희생과 헌신으로 폐허에서 성장을 이끌어낸 신화의 주인공은 바로 그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지하철의 노약자석에서 졸고 있는 젊은 놈들에게 호통을 칠 때나 기세등등하다. 그들에겐 문화를 향유할 여유도, 가치관을 재정립할 기회도, 젊은 세대와 자유롭게 소통할 방법도 없다. 그리고 닭다리 하나에 소주 한 병을 마음껏 마실 정도의 돈조차 없다. 시위에 나오며 그들이 꼭 무겁고 덥고 위협적인 군복을 걸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그 군복을 벗으면 그들은 사회에서 소외받고 외면당하는 초라한 노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아니지만, 나는 슬프다. 그래서 그들을 이용하여 모종의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이 더더욱 밉고 끔찍스럽다.


김별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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