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17 19:20
수정 : 2009.07.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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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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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말, 열아홉살 고3 아이들의 글을 읽는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일생에 관하여’, 이번 학기 네 번의 글쓰기 주제 중 마지막이다. 딴에는 ‘주변인’이었고 나름대로는 ‘질풍노도’였던 시절을 지나며, 보고 듣고 겪은 제 부모의 삶을 쓰게 하고 싶었다. 학교를 졸업하면 이런 글을 써 볼 일이 웬만해선 없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런 글을 쓰겠냐고 할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 굽이굽이 절절하고 코끝이 아려오는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이 글들에는 경상도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뼈 빠지게 일하고, 20대에는 공장들을 전전하다, 짝을 만나 가족을 이루고 이곳 시골 소도시에 뿌리내린 40대 중·후반들의 고단한 삶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아이들은 자신의 많은 부분들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다. 시인 안도현이 ‘나는 아버지가 모랫벌에 찍어놓은 발자국’에 불과하다고 노래했듯이 …. 아이들은 부모를 통해 인생의 빛과 어둠을 배워가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마트 계산대에서 녹초가 되어 돌아와 밥을 차려주는 어머니의 맨손을 보면서, 공구를 수리하는 아버지의 굽은 등을 보면서, 늦은밤 불 꺼진 응접실에 홀로 앉아 계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때때로 부모의 이혼과 외톨이의 기억을 통해서 ….
비록 가혹한 학습노동과 경쟁의 굴레 속에 살고 있으되 땀을 뻘뻘 흘리며 농구공을 다투고 쉬는 시간 팔짱을 끼고 매점엘 가고 과자봉지 펼쳐놓고 수다 떨면서 하룻밤은 우습게 뚝딱 새는 바로 그 친구들이, 손만 뻗으면 되는 자리에 언제나 있어 주었으므로, 그들로 인하여 열아홉살 이때가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이기도 한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
이제 더 나빠질 것도 없다고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는데, 교육 현장은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하듯 거침없이 막장으로 치닫고 있다. 이제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방학이 사라지고 있다. ‘학력신장 프로그램’이라는 방학중 보충수업과 초등학교 1학년까지 포함되는 교육청 자체 일제고사가 시행되고 있다. ‘초등 야간보충수업’이 벌써 일부 학교에서 시작되었고, ‘초등용 모의고사’도 준비되고 있다 한다. 일제고사 시행 1년이 채 안 되어 대한민국의 모든 초등학교 중학교가 일제고사 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교육이 그래도 ‘공’(公)자를 붙일 수 있게 해 주었던 마지막 방어선이 이명박 정부 출범 1년반 만에, 자율형 사립고를 끝으로 거의 허물어졌다. 가장 경미한 징계 사유도 될 수 없을 일들로 벌써 100명에 가까운 교사가 교단에서 쫓겨났다. 전교조는 그동안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렇게 집요하고도 혹독하게 당해야 하는가.
이제 더 남은 것도 없고, 그래서 끝이 보이는 것도 같은데, 그 뒤에 또 뭐가 있을 것만 같다. 저들은 언제나 상상력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왔으니까. 저들도 열아홉 시절에 제 부모의 삶을 바라보면서 저렇게 구슬처럼 맑은 글을 썼을까. 믿을 수 없다. 영혼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골백번도 넘는 시험을 치르게 하고, 방학을 빼앗고, 친구와 놀이와 사색과 번민들과, 사람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이 모든 것을 다 빼앗아버리는, 집단 가학과 다름없는 일들을 ‘교육 정책’이랍시고 공표할 수 있는 것인지 ….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런 글들은 앞으로는 점점 만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제 이 나라의 아이들은 스무살이 아니라, 열살도 되기 전에 영혼이라는 것을 빼앗겨버릴 것이므로.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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