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9.07.23 21:31
수정 : 2009.07.23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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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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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릴 적에는 오늘부터가 방학이다. 7월24일 아니면 25일이 언제나 방학하는 날이었다. 해묵은 날짜를 또렷이 기억하는 까닭은, 방학(放學)이 말뜻 그대로 “공부에서 놓여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핏빛 노을이 내려앉는 저녁 무렵 매캐한 모깃불을 피운 마당에 멍석을 펴고 옥수수나 감자를 먹다가, 문득 또 어둠이 스며들면 은모래 뿌려놓은 밤하늘을 헤다 잠드는 방학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런 방학이 사라져버렸다. 중·고등학교는 진작 그랬고 이젠 초등학생들조차 그러하다. 그저께 6학년짜리 막내와 제 어미 사이에 짧은 다툼이 있었다. “내가 공부하는 기계냐”는 항변이 있었지만, “네 친구들은 다 방학 때 ‘보충’한다더라”라는 어미의 반격에 그냥 무너지고 말았다. ‘친구들’은 아이를 주눅 들게 만드는 낯모를 적이다.
보충(補充)이란 ‘해진 것을 덧대고, 모자라는 것을 채운다’는 뜻이다. 이 땅의 학생들은 거의 다 지진아인 셈이다. 주어진 시간에 제 몫의 공부를 제대로 못한 놈들인 것이다. 한데 과연 무엇을 덧대고 무엇으로 채우겠다는 것일까?
그 ‘무엇’이란 곧 세계를 분석하고 계산해서 단것만 삼키는 기술 아닌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기회를 뺏고 기존 지식을 아이들 머리에다 채워 넣으려는 짓 아닌가? 그리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단독자인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따져서 생존과 안락을 도모하는 자를 만들려는 것 아닌가?
하나 세계적 금융위기가 우주선 항로의 궤적조차 정확하게 계산해내는 수학자들의 분석법에서 비롯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한다며 이 허점을 저 허점으로 보완하고 덧댄 계산들, 곧 연속된 작위(作爲)의 끝이 파산이요 또 세계적 재앙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 결과 누리엘 루비니 교수의 지적처럼, 아직도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하는 시스템이 지속되고 있다.”
정녕 이 세계는 계산할 수 없는 무위(無爲)의 바닷속, 한 점 섬에 불과하다. 부처도 그랬다. “저 텅 빈 동쪽 하늘을 과연 헤아려 계산할 수 있겠느냐!”라고. 방학을 채우는 이른바 ‘보충’이란 짓이 텅 빈 허공을 덧대고 채우려는 허망한 놀음이요 소모가 아니냐는 질문이다.
실은 방학은 또다른 배움의 시간이다. 아니 참된 자연의 이치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다. 이 세계가 사람만이 아니라 만 생명이 함께 깃든 곳임을 배우는 시간이다. 칠흑 같은 밤 우주의 숨소리를 느끼고, 세계가 이성이나 합리만이 아니라 감성과 신화로도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다. 가령 합리적 세계를 서술한 <삼국사기>의 독서법을 수업시간에 배운다면, 월명사의 피리소리에 감동해서 달님조차 멈추는 세계를 그린 <삼국유사>를 몸소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방학이다.
유전자(DNA) 구조가 두 겹의 이중나선으로 이뤄진 데서 보듯, 또 우주 원리인 태극이 음과 양 두 요소로 이뤄졌듯 인간과 우주는 두루 청실과 홍실로 꼬여 이뤄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만나 생명을 낳고 밤과 낮이 갈마들면서 시간을 이룬다는 사실이 진리다. 단일, 단색, 단선은 세상사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다.
노자가 이미 간절하게 충고한 터다. “공부는 하루하루 쌓아가는 길이지만, 진리는 하루하루 덜어내는 길”(爲學日益, 爲道日損)이라고. 배워서 지식을 쌓는 공부를 수업시간에 한다면, 지식을 덜어내 그 너머 자연을 느끼는 때가 방학이다. 세상을 단색으로 덧칠하고 빈 곳을 채우려 안달하는 저 ‘보충’이라는 괴물부터 없애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기괴한 몬스터가 되고 말 것 같아 두렵다.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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