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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4 21:36 수정 : 2009.08.04 21:36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저마다 개체로서의 고유성을 지닌다. 66억의 인류가 있어도 같은 두 사람이 없듯이 개체 고유성이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이렇게 다양한 생명으로 아름다운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며, 서로 다르기 때문에 조화롭고 평화로운 집단을 위해 필요한 것은 상호 이해와 소통과 관계 맺음이다. 하지만 서로 다르기에 이들 간의 갈등과 대립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결코 피해야 할 것도 아니다. 이해관계로 인한 갈등 구조는 소통과 상호 이해가 전제될 때 오히려 상생의 바탕이 되어 전체적 조화를 가져온다. 겉으로는 약육강식으로 가득한 생태계가 아름다운 것은 그들 식의 소통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폭력은 서로의 소통과 관계 맺음을 왜곡시키거나 단절시키는 행위이다.

평택 쌍용차 사태에서 사쪽은 농성에 돌입한 노조에 대하여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과 물, 전기 및 의약품 등을 차단했다. 경찰은 노사 간의 문제라면서 방관 자세지만 실제로는 주변을 차단하고 생필품의 전달을 방해하고 있다. 사람에게 음식과 식수의 차단은 죽음을 의미하기에 사쪽과 경찰의 행위는 농성중인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음으로 몰아가겠다는 것과 같다. 진정 경찰이 시민의 안전을 위한다면 노사 간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사쪽의 저지를 막고 농성중인 사람들에게 음식과 식수를 전달해야 했다. 농성하는 이들 역시 우리의 이웃이며 더욱이 해고를 당할 약한 이웃이기에 그 어느 쪽의 옳고 그름, 노사 간의 타결 여부, 혹은 농성장의 음식과 물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점이 아니다.

평택에서의 방식은 과거 인간이 인간으로서 취급되지 않던 시절에나 있었다. 거의 2천년 전 이야기인 삼국지에나 등장하고 사람의 목숨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던 봉건시대 방식이다. 근대사회에서 전쟁의 적들은 물론 사람의 목숨을 인질로 삼는 야비한 테러범에게도 음식과 물은 전달된다. 이것은 죄는 미워도 인간을 미워할 수 없다는 기본적 상식에 근거한다. 심지어 동물조차 자신의 영역이나 짝짓기를 위해 싸우더라도 상대방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치명적인 부상은 입히지 않는다.

어떤 이는 평택의 상황을 제2의 용산사태로도 말하지만 용산사태는 무리한 공권력의 집행으로 발생한 사고이며, 결코 경찰이 시민을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평택에서는 가진 자와 공권력이 의도를 지니고 시민을 죽음으로 몰고 있다. 이것은 약 30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시민 학살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단지 총칼만 없을 뿐이지 우리 역사에 깊은 상처를 낸 그 폭력의 모습이 다시 일상의 얼굴로 되돌아온 것을 말한다. 언제나 공공질서를 내세우는 경찰과 정부가 용산에서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이제는 시민에 대한 살인 방조에까지 참여하는 모습이 21세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인 한국의 현실이다. 약자의 생존이 위협받는 행위가 있을 때 이를 제지하지 않는 경찰과 정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 권력인가. 보호는커녕 기득권을 위해 또 무력 진압을 시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를 더욱 섬뜩하게 하는 것은 이런 폭력적 행위에 대하여 3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우리 사회의 지성인과 주류 종교인들이다. 전근대적인 야만적 살인행위에 의해 힘없는 이웃이 죽음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단지 노사 간의 문제나 과격 시위로만 환원시킨 채 눈감고 있는 자들, 과연 이들은 지성인일까, 종교인일까, 아니 과연 이들은 인간일까. 인권은 고사하고 인간성마저 상실된 상황에서 나는 증오와 대립, 그리고 무관심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며 평택에 서서 광주를 본다.

우희종 서울대 수의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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